바람도 조용했고, 사람도 없었고, 생각마저 볼륨을 줄여둔 느낌이었다. 마치 세상이 “오늘은 굳이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나는 그 틈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이 시간에는 답보다 질문이 먼저 온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대체로 별로 급하지 않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문득 이런 조용함의 원인이 늘 아침마다
기상전쟁을 벌이던 막내의 빈자리 때문인가 싶었다.
아침마다 알람과 실랑이를 벌이던 소리, “5분만...”을 세 번쯤 외치던 목소리가 사라지니 집이 갑자기 도서관이 된 느낌이다.
사람의 감정은 참 묘하다. 서로 바쁠 때는 일주일 내내 얼굴을 못 보고 살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멀리 타지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침 공기가 허전해진다.
감정은 늘 현실보다 상상에 더 성실하다.
그 허전함이 만든 정적은 아침을 약간 무겁게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늘 그렇듯 책상 앞에 앉아 ‘착각’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상당 부분은 착각으로 운영된다.
아내가 출근을 하고 책상에 앉아 펼치기 전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안경은 늘 그렇듯, 꼭 필요할 때만 사라진다.
분명 어제도 썼고, 분명 집 안 어딘가에 있을 텐데, ‘어딘가’라는 장소는 생각보다 넓고 애매하다. 안경은 늘 그 애매한 지점에 숨어 있는 물건이다.
소파 위를 뒤지고, 책상 위를 훑고, 혹시나 싶어 화장실 세면대까지 확인했다.
시야가 흐릿한 상태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고 있고, 찾아야 보기 시작할 수 있는 상황.
분명 여기 있었는데! 라는 확신과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찾아보지만 그 확신은 사실 기억이 아니라 희망에 가깝다.
결국 안경은 베란다 다육이 뒤쪽에서 찾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 다육이의 상태를 보고 그 자리에 두고 온 것이다.
늘 그렇듯 잃어버렸던 물건은 찾고 나면 선명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 아마도 내가 가장 먼저 봤어야 할 자리에 버젓이 놓여있다.
이런 장면은 새롭지 않다.
나는 이미 수십 번쯤 같은 장면을 반복해왔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사람이 물건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의 흐름을 잠시 놓친다는 사실이다.
정신은 이미 오늘을 살고 있는데, 몸은 아직 어제에 머물러 있을 때 물건들은 그렇게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나를 깨워준다.
기왕 오늘 물건을 찾는 사소한 이야기를 했으니 며칠 전 있었던 일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이 집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방식은 늘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막내가 일본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챙기던 날이었다. 나는 옆에서 나름대로 도움을 준다고 여행 선배처럼 이것저것 조언을 했다.
일본은 110v를 쓰니까 변환 콘센트는 꼭 챙기라고 했고, 여행의 본질은 결국 사진이니 셀카봉도 필수라고 말했다.
막내는 그냥 손에 들고 찍으면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요즘 아이들은 셀카봉을 약간 구시대 유물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분명 여행도중 아빠 말이 옳았다는 순간이 올 거라고, 그때 친구들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을 거라고까지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자신 있게 서랍을 열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셀카봉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있어야 할 물건이 없다는 아주 불길한 침묵이 흘렀다.
서랍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고, 다른 칸도 뒤져보고, 있을 법한 모든 자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셀카봉은 마치 이 집에 존재한 적 없다는 듯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날 셀카봉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막내는 짧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닫았다. 그 한숨에는 ‘아빠 말 안 들어도 됐을 뻔했는데’와 ‘그래도 없는 건 없는 거지’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결국 막내는 셀카봉 없이 여행을 떠났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 셀카봉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괜히 말 꺼냈다가 내 신뢰도까지 같이 분실될까 봐서였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오늘 안경을 찾다가 서랍 한구석에서 그토록 찾아도 없던 셀카봉이 안경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안경을 찾는 사람도 아니었고 아버지도 아니었고 그냥 멍청해진 성인 남자 한 명이었다.
사실 아까 안경을 찾으며 셀카봉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혼잣말로 꽤 심한 욕을 나 스스로에게 했다.
누가 들었으면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물건은 늘 이렇게 나온다.
필요할 때는 끝까지 숨어 있다가 이미 늦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에 나타난다.
마치 “지금은 아니야”라는 자기들만의 타이밍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신기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문득 생각했다.
물건을 찾는다는 건 사실 물건을 찾는 일이 아니라 내가 놓치고 있던 시간을 조금 늦게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 시간은 대체로 웃기고, 조금은 민망한 얼굴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