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9.책을 통해 형량과 당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by 마부자

아침부터 공기가 무거웠다. 뉴스에서는 강력한 한파가 시작된다고 했고, 실제로 하늘은 밀도가 높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오늘의 하루는 시작부터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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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책, 그리고 생각.


나는 굳이 외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날의 외출은 결심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대신 수면바지와 수면양발을 더 껴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커피를 내려놓고 책을 펼쳤다. 오늘은 온종일 책과 함께 보내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한파 덕분에 핑계가 충분했다.


사실 오늘 읽은 책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책은 아니었다. 블벗이신 희망꽃님의 추천으로, 정확히 말하면 추천이라는 이름을 한 선물로 나를 찾아와 읽게 된 책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법에 관한 책은 목록의 뒤쪽, 아니 아예 목록 밖에 두었을 것이다. 법은 어렵고, 딱딱하고,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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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이 분야의 책을 읽었을까?

왜 그동안 나는 법을 그렇게 멀리 두고 살았을까?


읽을수록 희망꽃님께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좋은 책을 추천받았다는 감정은 늘 뒤늦게 찾아온다.


법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은 어렵다. 바꾸기 힘들다. 화가 난다. 그리고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헌법재판소 연구관이었던 저자 역시 책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법을 다루던 사람조차 법이 어렵고 답답하다고 말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그 메시지는 단호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췄다. 지금까지의 나는 법을 제재의 도구로만 인식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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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벌을 주는 것이고,

처벌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되도록이면 엮이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런데 책은 그 생각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뜨렸다.


특히 ‘형량’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동안 내가 알던 형량(刑量)은 단순히 벌의 무게로만 생각해왔던 나에게 형량(衡量)은 균형의 문제라는 설명은 꽤 큰 충격이었다.


형량은 감정의 배출이 아니라 사회가 고민한 결과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당위’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법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당위를 말한다.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그 대목에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법은 차갑고 객관적인 기준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인간의 사정과 주장과 설득이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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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법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든 것

그래서 법을 이해하는 것은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나는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기분이었다. 법을 안다는 것은 규칙을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면서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생각은 계속 움직였다. 책장을 넘길수록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은 오후가 되어도 밝아지지 않았다. 한파는 여전히 집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따뜻한 생각을 몇 개 얻었다.


긴 이야기는 서평과 ‘그리고 남은 이야기’에 따로 남기기로 했다. 오늘의 일기는 그 문 앞까지로 충분했다.


오늘 나는 법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우리가 법을 알아야 하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한파 덕분에 집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생각이 깊어졌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제법 묵직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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