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0. 24절기 중 대한,
버티는 시간에 대한 소회

by 마부자


강력한 한파가 찾아온 하루였다. 뉴스에서 말하던 대한이라는 단어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아침 공기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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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기 전부터 바깥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숨을 들이마시는 일조차 준비가 필요해 보였다. 오늘은 몸이 아니라 계절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날이었다.


대한. 24절기 중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가장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절기다. 어릴 적에는 그저 달력 한 귀퉁이에 적힌 단어였고, 교과서에서 외워야 할 순서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단어는 점점 현실적인 체감으로 다가온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아, 지금이 정말 대한이구나’ 하고 몸이 먼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나라의 24절기는 참 묘하다. 과학이기 전에 감각에 가깝다. 날짜로 정해져 있지만 매년 똑같지 않고, 정확한 온도보다 분위기로 먼저 다가온다.


입춘이 오기 전의 공기, 소한과 대한 사이의 미묘한 차이, 경칩 무렵의 흙냄새 같은 것들.

절기는 숫자가 아니라 경험으로 기억된다.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웠다. 책상 앞에 앉아 차를 몇 번이나 데워 마시며 생각했다.


예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세세하게 계절을 나눴을까.


지금처럼 난방도, 예보도 없던 시절에 절기는 생존을 위한 지도였을 것이다.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고, 언제 몸을 낮춰야 하는지 알려주는 삶의 리듬표 같은 것.


그런데 지금의 나는 절기를 생존보다는 마음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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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은 무리하지 말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가장 춥다는 건,

지금은 버티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괜히 새로운 걸 시작하지 않아도 되고, 속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냥 잘 견디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


책을 읽다 말고 창밖을 다시 봤다. 하늘은 낮인데도 무거웠고, 빛은 얇았다. 이런 날씨에는 억지로 밝아지려 애쓸 필요가 없다.


절기는 인간에게 늘 같은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 맞게 살라는 말. 겨울에는 겨울답게, 대한에는 대한답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계절보다 늘 앞서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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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미리 당기고, 겨울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절기는 늘 제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순서를 지킨다.


소한 다음에 대한이 오고, 대한이 지나야 입춘이 온다. 생략은 없다. 그 질서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오늘의 나는 대한이라는 절기 안에 꽤 잘 들어맞아 있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크게 움직이지 않았고, 조용히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적었다.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았고, 대단한 결론이 없어도 괜찮았다. 절기가 허락한 하루였다.


아마 며칠 뒤면 다시 날이 풀릴 것이고, 또 다른 절기가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차가움 속에 머물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은 지나가는 이름이 아니라, 잠시 머물러도 되는 시간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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