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같은 새벽 차 한잔과 함께 책상에 앉아 ‘욕망’이라는 단어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오전 새로운 책을 펼쳤고, 운동을 마치고 짧은 점심을 먹은 뒤 오랜만에 잠시 휴식과 같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TV를 켰다.
그리고 채널을 돌리다 즐겨보는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늘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만났다.
재방송이었고 보려고 했던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특별히 집중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이상하게 채널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한파로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던 오늘, 나는 그렇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하루를 건너갔다.
프리다 칼로의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에 장애를 얻었고, 스무 살 무렵에는 버스 사고로 온몸이 부서졌다.
척추는 산산이 부러졌고, 평생을 통증과 함께 살아야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프다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이는 요즘, 그녀의 통증은 말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침대에 누운 채 움직일 수 없던 시간들. 천장에 거울을 달아놓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도망칠 수 없으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 프리다의 자화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대목에서 한참을 멈췄다. 우리는 보통 고통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녀는 고통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워 보였다.
프리다의 그림은 예쁘지 않다. 적어도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그렇다. 그녀의 그림에서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표정은 무표정에 가깝고, 색은 강렬하다.
그런데 그 강렬함이 이상하게 솔직하게 느껴졌다. 꾸미지 않아서가 아니라, 숨기지 않아서. 나는 그 그림들이 아름답지 않아서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삶에는 사랑도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는 열정적이었고 동시에 파괴적이었다. 사랑했고 상처받았고, 다시 돌아갔다.
나는 그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완벽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서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그녀의 삶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파도 살았고, 배신당해도 사랑했고, 무너져도 다시 그렸다.
프로그램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통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재료로 살아낸 사람이었다는 생각.
고통을 이겨냈다는 말은 너무 깔끔하다. 그녀의 인생은 깔끔하지 않았다. 대신 날것 그대로였다. 그래서 오래 남는다.
오늘 하루 나는 책 대신 사람의 인생을 읽었다. 화가의 작품이 아니라, 화가의 삶이 한 편의 에세이처럼 다가왔다.
그녀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인생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그림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자세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지, 어떤 마음으로 삶을 견디는지.
텔레비전을 끄고 나서도 프리다의 얼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파로 움츠러든 하루였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오늘 내가 겪은 불편함과 추위가 갑자기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비교해서가 아니라, 기준이 달라져서였다.
오늘의 일기는 프리다 칼로 덕분에 조금 다른 결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의 삶이 누군가의 하루를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나는 오늘 그녀의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자기 인생을 끝까지 바라봤는지를 본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선이, 오늘의 나를 잠시 흔들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