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에 눈을 떠서 커다란 베란다 앞에 서면,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스스로를 훑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간에는 숨길 수가 없다. 짧은 명상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잠시 멈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느끼며 넘긴 일주일간의 사색. 그 마지막에서 내게 다가온 문장은 너무 익숙한 서평에 관한 문장이었다.

“좋은 ‘서평’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함이라고 믿는다.


다르게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서평의 목적은 책의 평가가 아니라 독자의 선택과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여겨서다.”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중에서- 221page


평가.

1. 사물이나 사람, 행위의 가치, 수준, 의미를 따져 판단함.

2. 성과나 결가를 기준에 따라 매기거나 판단함.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면 평가는 중립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기준이 있고 판단이 있으며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삶 속에서의 평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평가는 언제나 감정을 동반하고 관계를 건드리며 자신의 자리를 흔든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평가 속에서 살아왔다. 학교에서는 점수로 평가받았고 사회에서는 성과로 평가받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말투와 태도, 심지어는 침묵까지도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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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를 받지 않는 상태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가받는 법을 먼저 배운다. 잘 보이려 애쓰고,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고, 기대를 어기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평가받는 자리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서서히 나를 평가하는 자리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다 평가를 받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은 평가하는 쪽에 서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수없이 평가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그 기준은 누구의 것인지, 그 판단은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따라왔다.


그래서 오늘 서평의 겸손함이라는 말과 서평의 목적은 책의 평가가 아니라 독자의 선택과 이해를 돕는 것이라는 문장 앞에서 내가 얼마나 쉽게 평가자의 자리에 서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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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나는 종종 책을 재단하고

저자를 분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가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평가는 성찰로 이어지지만 타인을 단정하는 평가는 쉽게 폭력이 된다.


문제는 이 둘의 경계가 생각보다 희미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나를 돌아본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타인을 재단하고 있었고 솔직한 의견이라고 말하면서도 누군가의 선택을 가로막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으로서의 나는 평가의 또다른 얼굴을 만난 것이 떠올랐다.


잘 견뎌야 한다는 기준과 씩씩해야 한다는 기대라는 평가에 맞추느라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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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가 기준을 벗어나면 사람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고립시킨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평가와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한 평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 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다와 나쁘다를 말하기 전에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먼저 묻는 방식으로 평가를 조금 늦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문득, 평가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니 결국 가장 잔인한 평가는 나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평가한다. 오늘은 잘했는지,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뒤처지지 않았는지, 그 평가가 지나치게 엄격해질 때 나는 쉽게 지친다.


그래서 요즘은 나 자신에게도 같은 겸손함을 적용해보려 한다. 지금의 나를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바라보는 연습이다.


평가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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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없으면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평가가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을 잃는다.


또한 책을 잃고, 맥락을 잃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잃는다.


오늘 책상 앞에서 나는 평가라는 단어를 다시 내려다본다.


판단하는 자리에서 돕는 자리로.

재단하는 위치에서 이해하려는 위치로.


나는 ‘평가’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평가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기준을 통해 의미를 살피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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