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0.평가라는 단어 앞에서 멈춰선 새벽

by 마부자


아직은 어두운 새벽, 진동과 함께 울리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이 떠졌다. 이불 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조금만 더 누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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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새벽에 일어나 급하게 할 일도 없고, 매일 비슷한 하루의 시작인데 오늘 하루쯤 늦어진다고 하늘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알람을 끄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눈을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지난 밤의 흔적처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강한 바람에 낙엽이 쓸려가듯 남은 잠도 함께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결국 몸을 다시 일으켰다.


베란다 창가에 비친 삐죽삐죽 솟아오른 머릿칼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루를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아도, 이런 장면 하나쯤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야채주스, 통밀빵 한 조각, 삶은 계란 두 개,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


이제는 익숙해진 아침 식탁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풀며 기지개를 켰다. 몸이 먼저 조심하라고 말해주는 요즘이다.


책장을 넘기다 ‘평가’라는 단어에 멈췄다.


그 단어를 붙잡고 글을 쓰며, 나 스스로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내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 셋을 키우고, 직장에서 30년을 보내며 어느 순간부터 나는 평가를 하는 사람의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기준을 정하고, 결과를 말하는 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그건 착각에 가까웠다. 나는 한 번도 평가의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늘 평가를 받는 쪽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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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직원으로서.


나의 일상은 늘 나를 평가의 대상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또렷하게 인식하게 됐다.


더 아픈 건, 그 평가를 남이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말이나 시선보다도, 내가 나에게 내리는 판정이 가장 가혹했다. 잘해냈던 순간보다 부족했던 장면을 먼저 떠올렸고, 통과한 날보다 탈락한 날을 오래 붙잡았다.


그 사실이 이 순간의 나를 조금 초라하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엄격한 심사위원은 늘 내 안에 있었고, 그 심사위원은 좀처럼 관대해지지 않았다.


글을 쓰다 보면 다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아쉬운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생각은 계속 이어졌지만, 문장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다 적어내지 못한 감정들이 페이지 밖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몇몇 마음을 일부러 남겨두기로 했다.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의 평가는 여기까지여도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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