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베란다 앞에 서서 잠깐 눈을 감았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도시의 공기와 차가운 창문 너머의 적막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고통은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각보다 자주 방향을 틀어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굴리다 글을 썼다.
오전에 서둘러 아내의 직장으로 향했다. 지난주 병원에서 내가 말을 꺼내고, 설명을 요구하고, 결국 감정을 조금 올린 뒤에야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넉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단정하듯 말하던 세침검사 일정이, 그렇게 한 번의 말싸움이 지나간 뒤에 아무렇지 않게 일주일 뒤로 옮겨졌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나 감사가 아니라 허탈함이었다.
조용히 기다리면 넉 달이고, 따지고 화를 내면 일주일이라면, 그동안 내가 기다려야 했던 시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상황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두지는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번에는 기다림이 줄어들었고, 불확실한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더 좋겠지만, 싸운 덕분에 빨라진 현실 앞에서는 감정을 정리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현실적인 태도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화가 날린 부메랑에 최소한 이번에는 일정이 앞당겨졌고, 불필요한 상상으로 넉 달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검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시계를 보니 고작 5분이었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오래 붙잡아두고, 몸을 긴장시키고, 생각을 꼬아놓던 일이었다.
실제로는 커피 한 잔 식기 전의
시간만큼이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섰다.
아내가 오전 반차를 내고 나와서 직장으로 데려다주기 전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고, 늘 그렇듯 메뉴 선택 앞에서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긴 고민 끝에 합의한 메뉴는 밀면과 만두였다. 다행히 집 근처에는 밀면을 아주 잘하는 집이 있다.
다만 이 집은 계절 감각이 뚜렷해서 12월과 1월에는 동절기 휴업을 하고, 2월이 되어서야 문을 연다.
밀면과 냉면을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매년 이 휴업 기간이 작은 시련처럼 느껴지지만, 오늘은 마침 2월이었다.
식당이 유난히 친근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딸이 그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가면 함께 먹으면 좋겠지만, 아내는 12시 30분까지 회사에 들어가야 했고 결국 우리는 먼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혹시 잠깐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딸은 정말로 잠깐 나와 얼굴만 비추고는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산서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깨달았다. 딸이 계산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그 순간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이건 의도치 않은 상황일까,
아니면 약간은 의도된 효도일까.
어찌 되었든 우리는 결과적으로 딸의 지갑을 털어 점심을 해결한 부모가 되어 있었다. 밀면과 만두가 유난히 부드럽게 넘어갔다.
식당을 나서며 웃음이 나왔다. 병원에서의 애매한 감정, 검사라는 단어가 남긴 긴장,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마음이 잠시 밀면 육수 속으로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삶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장면 하나로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1. 검진을 위해 일주일간 약을 끊었음에도 아내에게 큰 문제가 없어 오늘 세침검사를 무사히 받았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2. 추운 겨울 차가운 물밀면을 먹으면서도 땀을 흘렸습니다. 이제 몸이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아 너무 감사했습니다.
3. 병원의 시스템과는 별개로 검사를 하는 동안 웃으며 설명해주고 너무 친절하게 검사를 도와준 간호사 분들께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