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는 거창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준비했다. 커피 한 잔에 무슨 준비냐 싶지만 오늘은 물 건너온 녀석을 상대해야 했다.
평소라면 뜯고 붓고 마시면 끝날 일을, 오늘은 마치 수행처럼 시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가 생색을 내며 꺼낸 싱가폴 커피. 아무것도 사오지 말랬다던 내 말은 그 순간 증발했다. 커피 하나에 마음이 풀리는 나를 보며 스스로 웃었다.
나는 의외로 단순한 인간이었다. 아니, 단순을 넘어 저렴했다.
하지만 봉지를 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드립커피라니......
기다림을 싫어하는 내가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인내를 시험해야 하는 구조였다.
이건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선택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포트도 없어 냄비에 물을 끓이고, 유리컵을 준비하고, 필터를 얹는 동안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딸은 단단히 일러두었다.
절대 콸콸 붓지 말 것. 천천히, 조금씩, 숨을 고르듯 부을 것. 나는 바리스타 실기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되어 있었다.
향은 훌륭했다. 괜히 물 건너온 게 아니었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물을 한 방울씩 떨구는 동안 나는 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언제부터 딸의 말을 이렇게 고분고분 따르는 아빠가 되었나. 세월이 참 묘하다.
문제는 시간이 흘러도 커피는 완성되지 않고, 내 인내심만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잔을 들었을 때 커피는 이미 미지근했다. 따뜻함도 아니고 차가움도 아닌 어정쩡한 온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을 다시 데워 부으니 이번엔 싱거워졌다. 드립을 하나 더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웃음이 터졌다. 이건 꼭 국 간 맞추다 한 냄비를 끓이는 장면과 똑같았다. 인생도 이렇지 않나. 조절하다가 양만 늘어나는.
처음에는 딱 한 모금 분량이면 충분했는데, 고치겠다는 마음이 개입하는 순간부터 상황은 점점 커진다.
간을 맞추려던 의도는 사라지고 어느새 ‘이왕이면 제대로’라는 욕심이 끼어든다. 그렇게 한 번 더, 한 번만 더를 반복하다 보면 애초에 내가 원했던 맛이 무엇이었는지도 희미해진다.
나는 종종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해 일을 키운다. 잠깐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말을 덧붙이고, 작은 아쉬움을 못 참고 방향을 틀다가 결국 처음보다 더 복잡한 자리에 서 있곤 했다.
삶의 많은 순간이 그렇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오히려 문제의 크기를 키운다. 멈출 타이밍을 놓치면 선택은 선택을 낳고, 설명은 설명을 부르며, 상황은 처음보다 두 배는 무거워진다.
결국 나는 드립커피를 의무감처럼 마시고, 카누 하나를 탁 뜯었다.
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완성되는 이 단순함.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속이 편해졌다.
그래, 나는 여전히 이 맛이 좋다.
오늘 나는 비싼 향보다 익숙한 온도에 더 안심하는 사람이라는 걸, 웃으며 인정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녀가 사온 드롭커피의 향이 너무 좋았습니다. 번거로움은 별개로 두 사람의 마음에 감사했습니다.
운동하는 1시간 30분이 오늘은 엄청 짧게 느껴졌습니다. 시간을 번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도 한권의 책을 잘 마무리했습니다. 조금 더 발전한 듯 한 나에게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