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8.그 자리에 잘 서있었다는 증거의 하루

by 마부자

오전까지 봄비가 내렸다.

딱히 우산을 쓰고 나갈 일도 없었는데, 괜히 창밖을 몇 번 더 보게 되는 그런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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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은 이상하게 계획이 흐려진다.


“오늘은 좀 제대로 살아봐야지”라는 다짐도 물에 살짝 불린 종이처럼 힘이 빠진다.


오전을 책과 함께 보내고 나면 사실 묘한 기분이 든다.


책을 읽고 있으면 분명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데, 뭔가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 기분이 든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 지금 뭐 한 거지?”


그러면 마음속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도… 글자 많이 봤잖아.”


이 정도면 자기합리화도 꽤 고급 기술이다.

점심쯤 되니 비는 그쳤고, 몸이 굳어 있는 것 같아 운동을 했다. 운동은 늘 하기 전에는 귀찮고, 할 때는 힘들고, 하고 나면 뿌듯하다.


세 단계 중에 즐거운 건 마지막 10분인데

사람은 그 10분 때문에 나머지 50분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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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생도 비슷하다.

짧은 뿌듯함 때문에 긴 과정을 견딘다.

그걸 알면서도 또 한다.


인간은 참... 반복에 강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운동은 하면 끝이 나는데, 글은 써도 끝이 나지 않는다.


쓰면 쓸수록 “이게 맞나?” 하고 수정을 한다.

그리고 또 다시 쓴다. 그리고 또 수정을 한다.


짧은 글을 쓰면서도 수없이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난 작가의 꿈은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왜 쓰고 있지?” 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온다.


그래서 결국 깨닫는다.

글은 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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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집착에 가깝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조금 읽었고 운동 좀 했고 글을 조금 썼다.


정말 놀랍게도 이게 전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날이 나쁘지 않다.


예전의 나는 이런 하루를 “시간을 그냥 날려버린 날”이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이루지 않으면 그날은 실패한 날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별일 없다”는 말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심심한 하루였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꽤 괜찮은 결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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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오늘 같은 하루를 예전에도 수없이 보냈을 것이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 하루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느라 지금을 그냥 지나쳤다.


그때도 분명 비가 오던 날이 있었고 책을 읽던 순간이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이 그냥 “쓸모없는 시간”으로 묶여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무 일 없던 하루는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잘 서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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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비오는 날 김치전을 만들었습니다. 아내와 막내와 함께 막걸리 한 모금에 확 오른 취기에 감사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이제는 글이 잘 써진다고 느끼는 날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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