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당시, 우리는 꽤나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그녀에게 공부를 하는 방법을 알려줬고, 그녀는 나에게 노는 법을 알려줬다. 시험기간 전날에는 같이 밤을 새우고 암기를 하는 식이었다. 누가 더 빨리 암기하나 내기를 하면서 순식간에 파워포인트 몇 장을 해치워냈다. 그녀는 시험을 치고 온 날, 교수님의 구두시험에 웃기게도 내가 한 농담이 생각이 나서 바로 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다.
반면에 그녀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것에 탁월하지는 않았다. 누구는 그녀의 목소리가 닭 울음소리 같다는 것이다. 그래도 음악이 나오는 곳이면 ‘지금 춤을 출 때야!’ 하면서 내 손을 이끌고 들썩들썩 춤을 추기 시작했다. 쾌활하고 명랑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 무더운 여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친구와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거기에 콩나물도 넣고, 계란도 휘리릭 말아 3인분 같은 2인분을 만들어 먹었다. 여름인지라 땀이 뻘뻘 났다.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의 친구였는데, 우리는 이런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같이 뭉쳐 다니고는 했다.
나는 다른 지역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워야 했었던지라, 급하게 캐리어 두어 개 정도만 가까운 그 집에 맡겨 놓았었다. 그날은 그 집에 캐리어를 찾으러 간 날이었고, 감사표시 겸 해서 라면을 끓인 사람은 나였다.
“내가 그곳에 가있는 동안 말이야. 걔랑 문자로 얘기를 했거든. 근데 엄청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
“걔 얘기하지 마.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채로 얘기를 그녀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가 대뜸 그녀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니. 나는 바로 입은 다물었지만 무언가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되었다.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2개월 뒤,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될 일이 있어 자연스레 버스에 같이 탑승했다. 30여분쯤 지나자 우리의 이야기는 서서히 무르익었다. 나는 어떻게든 꾹꾹 눌러보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너의 이야기를 하니, 그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면서 네 얘기를 하지 말라더라. 무슨 일이 있었어?”
그녀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망설이는 듯했다.
“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내 얘기하지 말라고만 해?”
나는 그랬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는 그랬으니 솔직한 답이었다.
“… 내가 술을 마셨어. 와인을 좀.”
그 이야기의 시작은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을 줬다. 나는 그녀가 평소에도 활기차고 명랑했지만 술을 마시면 조금 더 과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를 했어.”
나는 아리송했다. 그가 내가 얘기하는 ‘그’인 건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것이 조금 이해가 되던 10초쯤 후에는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깊고 절절한 사랑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키스를 하다니? 그것도 자발적으로?
심지어 그녀의 눈빛은 엄청난 자책과 후회와 상처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친구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이고, 친구가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했는데…
당시 23살이었던 나에게 보통의 상황은 그 반대였다. 대개 이런 경우 나는 바람을 핀 상대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었고 그들을 위로해 주는 역할이었다. 바람을 핀 상대가 나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이해해 보려 계속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표정을 살피며 나의 반응을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성공했다면 ’ 혼란‘을 읽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왜 그랬냐!’ 고 나무라야 하나? 너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상대의 마음에 어려운 상처를 남겼을지 그리고 몇 명의 우정을 망쳤는지 연설해줘야 할까? 아니면, 시간이 이미 이만큼 흘렀으니 빨리 잊으라고, 새 출발을 응원한다고 말해야 하나? 그래도 나는 너의 편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건 그간 배운 그 어느 것들과도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꺼이꺼이 거리며 우는 그녀의 울음을 멈출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냥 그녀가 울음을 다 토해내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울음을 다 길어낼 때쯤이면, 자신의 후회와 아픔이 삶에 스며들어 그녀가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믿음만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