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증후군
둘째의 돌잔치를 치렀다. 코로나로 가족들과 밥상 마주함도 꺼리는 마당에 어찌 보면 미친 짓이지 싶었다. 이미 한차례 연기를 했고, 코로나가 언제 진정될지 알 수 없는 탓에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실행하거나 취소하거나. 나와 비슷한 자들이 많아서 인지 돌잔치 업체 측에선 우리에게 가장 큰 홀을 배정해줬다. 예약했던 자들이 취소해서였을까? 결국 그 주제넘은 홀에 내가 아는 모든 이를 불러 모았고 좌석의 반을 겨우 채웠다. 이윽고 1년을 조금 넘게 산 나의 둘째의 돌잡이가 시작되었고, MC가 내게 물었다.
"아이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40년 가까이 살아오며 수백, 수천번을 고민해온 주제이니... 이후 돌잔치를 찾아준 사람들에게 건넨 감사의 인사 또한 같은 내용으로 전했다. 혹자는 준비해온 멘트라 했고, 나를 가장 믿어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그것을 '말만 번지르르하다'라고 표현했다.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좋은 사람이길 소망한다. 심지어는 죽어가는 자 또한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이딴 복잡한 것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금의 나 그리고 당장 내 앞에 있는 그 누군가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나라고 피차 다를 게 있을까? 나의 아이가 판결봉을 잡아 판사가 되건, 돈을 잡아 억만장자가 되건... 그런 직업 혹은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단어 앞에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빠진다면 큰 가치가 없다. 권력에 취해 판결봉으로 죄 없고 선한 자들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돈을 쌓아 사람들 위에 서려한다거나. '나쁜 사람'이라 분류되는 그런 자들이 되기 싫었다. 내 주변에 그런 자들이 있는 게 싫었다. 나의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다.
'적당히'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과하지 않은, 균형과 비율 등을 대신하는 표현이다. 배려가 지나치면 부담이 되고 나이 먹어 가치관이 뚜렷해지면 꼰대가 된다. 착해도 지랄, 딱 부러져도 지랄. 챙겨도 지랄, 안 챙겨도 지랄. 결국 뭘 해도 지랄이다. 주변에서 강요하는 '적당히'란 말을 도무지 모르겠다. 내 기준의 적당히는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변한다. 현대 사회에 맞게 사회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봐야 할까?
얼마 전 TV에서 코끼리와 상아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계속되는 밀렵에 상아를 가진 코끼리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코끼리가 생존을 위해 상아가 없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애초 상아가 없거나 짧은 개체끼리 살아남아 번식해 유전학적인 성질을 이어받고 있다 말했다. 생물학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면 꽤 논리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 쪽이 답이라 본다. 거지 같은 대입이지만 같다 붙여본다.
좋은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나쁜 사람들이 사라진다. 끼리끼리 논다고 좋은 놈이 좋은 놈을 알아본다. 나쁜 새끼들의 가치관이 좋은 놈들에게 맞을 리 없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거나, 그들이 나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배려의 빈도가 적어지고 있다면 나쁜 사람으로 분류되어 서서히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퇴화'가 진행 중인 것일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눠주고,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착하게' 살아가면 곧 좋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모든 종교의 교리 또한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나 혼자 천국 가자고 또는 나 혼자 다음 생에 미천한 것으로 태어나지 않고자 교회니 성당이니 절이니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민을 해본다. 상상을 해본다. 한국땅에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큰 업적을 남기고 간 좋은 사람,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을 죽인 나쁜 사람. 그들은 과연 그들의 첫 생일 돌잔치 날, 무엇을 잡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