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거나 썩지 않는 나로 살아가기
웹디자인을 하는 우리는 오늘도 사무실 한 켠에서 퇴근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해가 지나면 각자가 사용하는 시간들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우리가 집착하는 '경력'으로 쌓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시간만 지나면 우리는 언젠가 10년 차 혹은 그 이상의 연차가 될 테니까요.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네 살배기 꼬마처럼요.'
별다른 '나아짐' 없이,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술, 지식을 쌓지 아니하고 단순 경력만 많은 자를 일컬어 우리는 '물 경력'이라고 합니다.
혼자 일하지 않는 이상, 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실무를 하며 언젠가 한 번쯤은 물 경력을 고민합니다. 경력이 쌓일수록 그 고민은 더욱 깊어가고, 구직에 실패하거나 연봉 협상 시즌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깊이 있고 완성도 높은 작업물을 바라볼 때 이러한 고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듯 막막해집니다. 고민에서 도망칩니다. 이미 큰 노력 없이 경력은 쌓였고 내일도 출근해서 그저 하던 일을 반복하면 될 테니까요. 나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환경이 나를 그리 만들어 놓은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쇼핑몰 업체 가면 경력에 도움 하나도 안된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로는 물 경력만 쌓일 거다"라고요. 그럼 반대로 전투적이고 촌각을 다투는 에이전시 생활에서는 물 경력을 논하지 않아도 될까요? 되묻습니다. "에이전시 생활을 하는 당신. 지금의 당신과 내년의 당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라고...
대부분 대답하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늘었는지, 단순히 경험이 쌓여 그 안에서 생기는 일종의 통찰력. 그로부터 발생하는 업무 해결 능력 등이 높아질 거란 막연한 상상을 합니다. 딱히 나 자신을 정확한 척도 안에서 시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웹디자이너들은 진급시험 혹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과의 치열한 경쟁 따윈 하지 않으니까요.
여기 자신이 물 경력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PC에 꼽혀있는 랜선을 뽑습니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으로부터 나를 분리합니다. 자, 지금부터 늘 하던 방법대로 시안을 잡습니다. 어렵지 않겠지요? 몇 년 동안 반복해서 해 온 일이니 이까짓 거 껌이겠지요. 허나 정말 쉬울까요?
관련 기획, 로고타이프나 심볼(CI, BI), 키 비주얼에 얹을 이미지, 아이콘, 디자인 전체를 참고할만한 레퍼런스 따윈 없습니다. 뭔가를 따라 하거나 베낄 수도 없습니다. 어디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 그대로의 결과물이 나오거나 그마저도 못한다면 하얀 캔버스만 덩그러니 열려있겠죠.
만약 몇 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면 당신은 물 경력입니다. 치열한 에이전시판을 지나왔건 경험이 많든 적든, 학벌, 재능 등 단어는 무의미해지고 그동안 당신이 잘해오고 있었다는 일종의 자위도 산산이 바스러집니다. 나를 합리화시킬 방법들을 찾아봅니다. 머리가 그리 돕니다.
'기획 없이 어떻게?', '로고 디자인은 우리 영역이 아니잖아.', '이미지 소스 없이 무슨 작업?'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같은 부류 때문에 디자이너 전체가 저평가되고 있다"라고... 혹자는 얘기합니다. 각 분야가 세분화되고 그에 따라 전문성에 치중한 업무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옵니다. '단순 포토샵 기능직'으로 분류될 사람이 떠드는 핑곗거리라 치부합니다. 모름지기 전문성이라 함은 점이 아닌 면에서 나옵니다. 넓은 스펙트럼에서 나옵니다.
찬찬히 되짚어봅니다. 웹디자인이 아닌 바깥 고리, 그러니까 상위 디자인 영역에서 그 사례를 살펴봅니다. 의상, 건축, 자동차, 게임 등의 디자이너 또는 그 외 많은 디자이너들. 조금의 관심이 있다면 해당 카테고리 안에서 각각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으며 각종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한 부와 명성을 지닌 사람들.
반대로도 살펴봅니다. 흔히 우리가 바라보는 웹디자인 영역. 그 안에서 위와 같은 스타급 디자이너가 떠오르시나요? 네이버, 카카오, 다음 등 국내외 파급력 있는 서비스의 UI를 설계한 디자이너의 이름. 알고 계신가요? 떠오르지 않습니다. 알지 못합니다. 한 명이 작업한 게 아닌 팀 단위 작업이었다 해도 리더급 디자이너였다면 수면 위로 올라와 충분히 부각되었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단순 국내 시장 안에서 웹디자이너를 바라보는 편협하고 비상식적인 시각 때문에 그러한 걸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이버나 카카오 등 우리가 알만한 거대 기업의 디자이너들을 예외로 본 다 치더라도 한국땅의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서슴없이 합니다. 우리가 그리 만든 겁니다. 피곤하니까요. 자신이 힘들어지니까요. 다양하게 많이 알고 작업한다고 해서 당장 자신의 급여에 변동이 없으니까요. 이해는 합니다. 공감도 되고요. 허나 그렇다고 마냥 포토샵만 보고 있거나 각종 소스에 의지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물 경력이 될 가능성이 높은 길로 걸어가서는 안됩니다.
최근 상영했던 영화 '포드v페라리'에서 점의 전문성을 면으로 확장시키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맷 데이먼이 맡았던 배역. 바로 지금의 포드 자동차를 있게 한 주역인 '캐롤 셸비'입니다.
레이싱 드라이버였던 캐롤 셸비는 자신이 능력 이상의 것을 해내기 위해 자동차를 분석합니다. 단순 운전 스킬에만 집중하는 게 아닌 관련 지식들을 섭렵하며, 자기 자신의 재능에 당시 과학 기술과 여러 가지 도움될만한 것들을 접목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요? 내가 가진 재능 그리고 운전 스킬만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면 설령 그것이 편법이라 한들, 치트키 비슷한 무엇이라도 써봐야 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결국 셸비는 엔지니어, 디자이너를 거쳐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기업인으로 성장하고 오늘날의 포드 자동차를 있게 했습니다.
가장 명확하고 가능성 높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웹사이트 하나를 디자인하며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들에 관심을 갖는 것. 비록 분야가 세분화되어 직접적으로 내가 할 일이 아니어도 다시 한번 바라보는 것. 그런 것들이 쌓여 나의 경험들이 확장되고 결국 넓은 스펙트럼의 전문성으로 이어지는...
꽤 많은 디자이너가 자신이 사용하는 PC조차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 조차 없습니다. 군인에 비유하면 일종의 '총'같은, 컴퓨터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합니다. 포맷은 해봤는지, 심지어 포토샵, 폰트, 각종 플러그인도 혼자 설치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초년생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 같은 사람들을 '전문성 결여'로 판단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고 자신의 PC조차 파악 못하는 사람이 다른 것 또한 관심 가질 리 만무합니다.
핑계 대는 일 따위 없었으면 합니다. 단순 UI 디자인만 하기도 벅차다고요? CI나 BI를 잡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무슨 근거와 논리로 사용자 UI에 아이덴티티를 녹인다는 말일까요? 사진을 직접 찍어 편집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구도와 색감 등을 논할 수 있을까요? 아이콘 세트 하나 만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검색할 시간이면 한 번쯤 만들어볼 시도를 하는 게 백배 나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한국에서 거대한 프로젝트 리딩은 보통 개발자들이 맡게 됩니다. 기획자에게 끌려다니고 개발자에게 치이고...
개인적인 바람으로 우리나라에 디자이너 출신 리더급 인력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야 우리 직군 전체의 가치가 상승합니다. 그리해야 개발 위주로 굴러가는 이 거지 같은 판때기를 뒤집어, 웹/앱 개발자와 동등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쉬운 길로 걸어가며 전문성이란 단어로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았으면 합니다. 몇 해가 지나 시커먼 물 안에서 허우적대는 '물 경력을 지닌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랜선 뽑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누군가를 코칭할 자격도, 당장 자신이 받고 있는 연봉에 대한 불합리를 따질 자격도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으로 조금씩 걸어가세요. 좋은 경험과 전문성은 그 안에 숨어있습니다. 오늘도 길고 딱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