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덕분에 ‘다시 만난 국어’

『나민애의 다시 만난 국어』

by 마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를 생각하며 집어든 책이었는데, 읽을수록 내 학창 시절 기억의 편린들이 드라마 예고편처럼 이 장면 저 장면으로 옮겨지면서 떠올랐다. 불교에서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 중 한 명을 닮아 험악한 인상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낭만적인 시 읊기를 좋아하셨던 국어 선생님이, 책벌레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읽은 『데미안』에 푹 빠져 있던 날들이, 그리고 엄마와 내 아이의 얼굴까지 스쳐 지나갔다.


책의 저자인 나민애 교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글쓰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 학생만 가르치다가 아들을 키우며 답답한 마음에 책을 썼다는 이야기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유퀴즈’나 ‘세바시’ 같은 유명한 매체에 나와 문해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생생한 경험담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널리 알려졌지만, 시인 나태주의 딸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아버지와 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 아빠가 딸에게 해준 말

내가 중학생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국어라는 과목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사회에 발 디디기 전 공부만 하면 됐던 시절에 책에 좀 더 깊이 빠져 지낼 수 있었을까 와 같은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스쳐 지나갔다. 저자는 시인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봤던 아빠의 모습, 들었던 아빠의 말을 성인이 된 지금까지 예쁜 보자기에 싸 주머니 깊숙이 넣어 소중하게 지니고 다닌 듯했다.

”인간은 말을 담는 자루야. 네가 삐딱하게 있으면 선생님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간단다. 말이 잘 들어오게 똑바로 앉아서 듣거라. “
”거북귀(龜) 한자는 참 쓰기가 어렵다. 어떤 학자는 이 글자를 잘 쓰려고 늘 연습을 한다고 해. 너는 이런 분들을 만나러 서울로 가렴. “

같은 말을 해도 시인의 감성이 묻어나는 조언이자 잔소리가 너무 다정하고 정겨워 나도 가지런히 적어 두었다.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책은 ‘살아있는 유기체’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책을 계속해서 읽어가면서 책이 문자화된 텍스트나 정보의 집약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책을 열 살 때 읽고, 서른 살에 읽고, 지금 읽을 때, 그때마다 책이 나에게 하는 말이 다 다릅니다. 내가 달라지면 책도 달라집니다. 내가 자라면 책도 자랍니다.

같은 책이라도 ‘그때마다 책이 나에게 하는 말이 다 다르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의 홀든이 고뇌하는 인간처럼 멋져 보였다가 철부지로 보이기도 하고, 『B사감과 러브레터』 의 B사감은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는 짓궂은 여자였다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도 계속해서 책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나민애 교수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항상 쌓아 놓은 책과 함께였다고 한다. 곁에서 뒤적거리다가 따라서 읽고, 재밌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좋아하는 시가 마음에 들어와 이 책에서도 시 몇 편을 소개했다. 그리고 시 읽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이건 비단 시에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모든 활자를 읽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시인이 입체적인 순간을 평면에 옮겨 놨으니, 우리가 읽는 동안 수많은 감각들을 동원해서 평면을 입체로 다시 구현하는 겁니다. 마른 꽃잎처럼 우리에게 온 시가 우리 마음속에서 꽃차로 피어나는 것이 ‘시 읽기’입니다.

단 둘이서만 나누는 대화

책을 볼 때는 가만가만, 저자하고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보편화로 궁금한 건 질문 한두 줄로 모두 해결 가능한 세상이 됐다. 물론 편리하고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지만 생각하고 찾아볼 기회가 줄어든 건 아쉽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공룡, 곤충, 동물에 빠져있는 아이를 위해 나는 종종 도서관에서 도감 책을 빌려오거나 마음에 드는 건 구매해 둔다. 그리고 아이가 궁금해할 때마다 같이 도감을 뒤적이며 찾다 보면 시간은 걸리지만 그 시간만큼은 검증되어 믿을만한 정보에 대해 같이 생각하고 얘기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중요한 건 질문력이라고 한다. 내가 명령한 대로 움직이는 코딩과 비슷한 구조 같다. 내가 하는 질문에 따라 인공지능이 주는 답변의 질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질문력을 키우려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연습이 먼저인 것은 국어국문학 박사가 아닌 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책을 보며 저자와,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와 가만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만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고의 도파민을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어른 안에는 아이가 있다’

‘사람은 내 안의 아이를 간직한 채로 어른이 된다’고 나민애 교수는 말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품은 채로 살면서 이따금 지치거나 그리울 때 꺼내 보면 아득한 편안함 속에서 미소를 짓게 된다.

어린 시절은 ‘행복했으나 행복한 줄 몰랐던 시절’이자 ‘엄마와 엄마밥이 지켜주었던 세상’이었기 때문에 나를 지탱해 주는 커다란 나무의 뿌리였다. 그리고 커진 나무 밑에는 어느새 나의 또 다른 어린 나무가 첫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성선설』 함민복

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편의 시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다. 위트 있으면서도 감동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무심코 손가락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

우리 집 7살 아들에게도 들려주었더니 자기는 그러면 손가락이 9개 여야 하지 않냐며 웃는다. (출산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양수가 터져 9개월 만에 세상으로 나온 본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다시 만난 나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뚫어지게 바라보다 깨달았다.

부모의 자식으로서 또 누군가의 엄마로서 산다는 건 소중하면서도 귀찮고, 피곤함이 묻은 웃음을 짓고, 최선을 다하지만 항상 후회하는, 신산한 인생을 그래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순간들을 선물한다는 것을.

다시 만난 국어에서 나를 다시 만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