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를 통해 그리운 이에게 전하는 염원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

by 마치

절도 사건에 휘말려 곤란한 상황에 놓인 청년 레이토. 뜻밖에 먼 친척인 엄마의 이복언니 치후네의 도움을 받고, 대신 신사에 있는 거대한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다. 녹나무에 찾아오는 손님을 응대하는 단순한 일로 생각했지만 레이토는 우연히 사람들의 사연을 추적하게 되고 녹나무의 진정한 역할을 깨달으며 자신이 단순한 관리인이 아닌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녹나무와 이어주는 ‘파수꾼’ 임을 깨닫는다.


<히가시노 게이고 데뷔 35주년 기념 출판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로 유명한 일본 작가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추리보다는 잔잔한 판타지 소설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2020년에 35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책이라 했을 때 제목도 그렇고, 기존의 가가형사나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처럼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추리는 비중이 적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렇다고 추리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특유의 정갈함과 범접할 수 없는 녹나무의 신성함이 그림 그려지듯 묘사되어 쉽게 읽혔다. 오랜만에 책을 읽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순수한 청년 레이토>

『녹나무의 파수꾼』은 비교적 안정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레이토의 성장 스토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반에는 유치장에 수감도 되고, 녹나무를 지키는 일에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이모의 지시에만 따른다. 하지만 녹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 각자의 사연을 듣게 되고, 또 우연히 추리까지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레이토에게 능력 있는 사업가인 이모 치후네는 냉정하지만 마음속에는 조카를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조언과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마치 나에게도 하는 말 같아 처음 읽었을 때 인덱스를 붙여 놓고 나중에 노트에 적어두기도 했다.

똑똑히 기억해 두세요. 비굴해지는 건 일종의 어리광입니다. 어차피 나 같은 사람은,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 두는 게 속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언제까지나 허용될 만큼 이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요.
“레이토의 삶의 방식에 참견은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는 건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해 두도록 하세요. “


<녹나무의 신비로운 의식, 예념과 수념>

처음 레이토가 녹나무의 파수꾼 일을 맡았을 때 이모 치후네는 녹나무에 ‘기념하러 온다 ‘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파수꾼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사람들은 그믐달이 뜨는 날 예념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네고, 보름달이 뜨는 날 수념을 통해 내가 전한 이야기에 대한 염원을 받는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설명만으로는 녹나무의 진정한 역할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후 치후네는 몇 문장으로 녹나무의 의미를 레이토에게 넌지시 던져줬다.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본 가고시마 현의 가모 하치만 신사에는 수령 1600년의 거대한 녹나무가 있다고 한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로 나무 기둥 안에 조그만 공간도 있다고 하니 보름달이 뜨는 날 이곳에 가면 염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하다. 실제 사진을 보니 레이토가 처음 녹나무를 마주하고 느낀 감상이 십분 이해되고, 나도 옆에서 같이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녹나무를 실제로 마주하고는 압도되었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뭔가 강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인터넷상에서 초강력 파워스폿이라는 표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 오면 누구나 똑같은 감각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출처: 가고시마 공식 관광 앱 사이트 (kagoshima-kankou.com)

<애니메이션화 그리고 후속작 『녹나무의 여신』>

2026년 1월에 일본에 애니메이션화 되어 개봉한다고 한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드라마와 영화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는데 애니메이션은 『녹나무의 파수꾼』이 처음이다. 아마도 추리를 살짝 곁들인 판타지 요소와 말미에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감동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가 사는 커다란 나무를 보며 거대한 솜사탕처럼 폭신해보여 사랑스러우면서도 신비로워 보였는데, 토토로의 이 나무도 녹나무라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녹나무가 생장은 느리지만 수천년을 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빠르진 않지만 착실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비유하기도 한다고 한다. 녹나무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으니 처음에는 낯설었던 녹나무가 가까이 두고 친해지고 싶은 친구처럼 느껴졌다.

파수꾼의 녹나무 또한 어떤 모습으로 영상에 담길지 기대된다. 『녹나무의 파수꾼』 출간 4년 후, 『녹나무의 여신』이라는 제목으로 후속작이 나왔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녹나무의 또 다른 비밀이 밝혀진다고 하니, 애니메이션을 기다리며 한번 더 녹나무를 만나러 가봐야겠다.

레이토와 치후네를 앞세운 포스터 (출처:kusunoki-mov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