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할 겨를이 없었던 ’지루함‘

올해 읽은 책 중 베스트

by macropsia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올해 내가 읽은 인문학 서적 중 최고의 책!


외래 진료실 앞에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과 그들과 함께 온 보호자들에게서 제일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분위기는 ‘지루함‘이다.


집이 멀어서 일찍 오거나, 피검사를 하고 진료를 봐야 해서 일찍 오거나, 대기 환자가 너무 많은 진료과라 조금이라도 일찍 진료를 보기 위해서나… 이유는 다양하다.


자기 진료 시간까지 기다리는 동안은 ‘지루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기하는 사람들은 ‘지루함’을 달래고자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끊임없이 스크롤한다. 젊은 사람들은 인스타 릴스를 끊임없이 넘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유튜브를 보는데 이어폰 없이 소리를 크게 해 놓고 보는 바람에 간호사의 제지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후 외래 진료가 끝날 무렵에 마지막 예약 환자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간호사, 외래 수납 직원들에게서도 마지막 환자를 기다리는 ’지루함’이 느껴진다. 그들도 자기들의 퇴근 시간을 결정할 ‘마지막’ 예약 환자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그 순간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이 ‘지루함‘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한가함‘과는 어떻게 다른지, 인간은 왜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 것인지를 파고든다.


‘지루함’이라는 일상적이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주제로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고,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해서 정주생활을 시작한 것이 지루함의 시작일 수 있다는 책 초반부의 설명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다른 언어로 쓰인 책들 중에 이런 빛나는 책들이 여전히 많을 텐데… 전문 번역에서도 AI의 도움에 힘입어 보물 같은 이런 책들에게 접근이 쉬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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