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심리상담을 받았다. 너무나도 화가 나는 일 때문이었다. 거짓말로 베베꼬인 사람을 만났는데, 꼬이고 꼬여서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것도 거짓말이었을까, 이것도 거짓말이었을까. 어디까지 였을까. 하루 종일 그 생각에 갇혔다. 뭘 하려고 하다가도 고개를 돌릴 때마다 과거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주변 사람을 붙잡고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일을 할 수는 없기에 꾹꾹 참았다.
원래의 나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편이라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는 말을 하면 “네가 화를 냈다고?”라는 말을 듣곤 했다. 같은 일을 겪고도 옆에서는 짜증을 내고 있는데 나는 가만히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둔해서 스트레스도 잘 받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에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너무 열이 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도저히 스스로 누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털어놓고 싶었다. 지인이 상담을 받았다는 선생님의 연락처를 받아 약속을 잡았다.
선생님은 물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기분이 어땠어요?"
화가 났어요.
"왜 화가 났어요?"
모르겠어요. 저를 속인 그 사람한테 화가 난 것 같아요.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요?"
음..
선생님은 내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또 다른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그때는 어땠는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어릴 때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없는지도. 성격은 7살 이전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만들어진다. 내 생각과 행동과 말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머릿속 마음속 저 깊숙이 박혀있는 심리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지금 수현 씨는 그 사람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을 만난 스스로에게 화가 난 거예요. 스스로를 너무 믿는데 그걸 어겨버린 거지. 그게 화가 나는 거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느낀 감정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게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나를 너무 믿는 편이라고 한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피할 수 있던 일을, 그만할 수 있던 일을 계속 이어간 내가 너무도 싫었던 거다. 내 믿음은 잘못되었지만 내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머릿속에 강풍이 휘몰아친 그 사건 이후 부쩍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생겼다. 900쪽에 육박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가 하면 정신과 의사가 나와 말하는 유튜브를 찾아본다. 아직은 알아가야 하는 게 많지만 깨달은 한 가지는"누군가 어떤 문제로 화를 낼 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꼭꼭 숨어있지만 촉을 뾰족하게 세우면 보일 때도 더러 있다.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다가 ‘아 좀 그런가? 기분이 나쁘려나?’ 싶었지만 어떤 말을 툭 하고 던졌다. 역시나 친구의 카톡이 심상치 않았다. 말투가 미묘하게 바뀐 걸 보니 나한테 서운함을 느낀 것 같았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뭐야 속 좁게 그게 왜 서운한 일이야’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사실 내가 잘못한 게 맞는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의 행동에 서운함을 느꼈으면 내 기준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보고자 하는 게 맞는데 말이다.
지금은 내 감정의 진짜 원인을 파헤쳐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마음에 가시가 돋칠 때마다 그 이유를 계속 생각해본다. 신기하게도 처음으로 느낀 생각은 진짜 원인이 아닐 때가 많다. 대체로 나에게 실망할 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에 대한 방어가 다른 감정으로 튀어나는 경우였다. 이걸 알고 나니 주변의 사람의 감정도 분석해보게 된다. 잘못짚을 때도 많이 있지만. 사람의 심리는 알아가면 알 수록 인생을 예습하는 느낌이다. 내 심리를 잘 파헤쳐서 나를 다듬고, 이상한 사람은 빠르게 파악해서 멀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