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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Jul 15. 2023

전남자친구 부검

귀여운 팔

    어떤 선물은 그 선물을 준 사람보다 더 오래 남는다고 했다. 그의 흔적을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당연하고 가까운 물건들이 그가 선물해 준 것이라는 걸 자각할 때쯤이면 조금은 슬퍼진다.



잠옷으로 입고 있었던 그의 흰색 티셔츠, 매일 뿌리고 나가는 게 루틴이었던 향수, 다이어리에 언제 끼워놨는지 모를 같이 찍은 사진들.


잊을만하면 '나를 잊었니?'라며 꼭 하나씩 그 사람의 물건이 나온다.


그러면 나는 조금 놀라면서도 다시 슬퍼진다.

분명 우리가 그 사진보다 가까웠고, 티셔츠보다 당연했으며 향수보다 더 특별한 사이였던 때가 있었는데.



왜 헤어졌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나는 '멍청해서'라는 대답으로 그 모든 사건의 결실을 네 글자로 대신해 버렸다.


그와 이별하고 나선 따로 그에 대한 부검을 하지 않았다.


다 잊어버려서.

사람은 역시 안 좋은 기억들을 지워버리는 습성이 있는걸 나는 몸소 실감했다.


왜 헤어졌지. 한참 그 생각에 잠겨있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지쳤네."


난 누구보다도 바쁘게 사는 중이었는데 지쳤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ㅋ. 네 성격에 1부터 100가지를 나열하면서 그 자식은 개자식이라고 욕할 애가 단지 멍청해서라는 말론 부족하지. 이유가 너무 간결하잖아. 설마 네가 2년 동안 만난 애를 단지 멍청해서란 이유만으로 헤어졌겠냐? 매번 이 관계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징징대던 애가?"



속상했다.

나를 더 잘 아는 애가 전남친이 아닌 많이 친하지도 않은 애인 것만 같아서.

이런 식의 감정적인 교류가 그와는 잦지 않았어서.


2년 동안 만난 사람 보다 대학교 입학할 때 잠깐 친하고 군대에 들어가 버려서 3개월에 한 번씩 전화하는 애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부엌에서 홀로 깨진 접시를 맨손으로 비닐에 주워 담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했던 건 해달라는 대로 컴퓨터처럼 1차원적인 생각만 하는 애가 아니라

감정적인 교류를 하고 싶었던 건데.

그에게 난 그저 있어도 되는 사람이었고, 없어도 딱히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갈구하지 않았고, 헤어질 때도 바로 뒤도는 사람이었다.  


받고 싶어 했던 그 선톡.

‘뭐 해?’라는 말이 가장 어려웠던 사람.

첫날 조금은 울었다.

듣고 싶던 그 한마디 때문에.

연애할 때 할 말 없으면 연락 안 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뭐 해 한마디 정도만 해주지.

나는 왜 그 흔한 말을 듣고 싶어 했나.


알고는 있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누구도 틀린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옳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된 거지.


종종 타이밍이란 걸 떠올려본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해져서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옳았지만

그의 시점에서 나는 항상 틀린 사람이었다.

그는 입장 대입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이기적으로 굴걸.


이유 없이 그가 준 에어팟 키링이 어떤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는데 바닥에 떨어졌다.

맨날 제자리에 두는 그가 준 향수가 사라졌다.

그의 티셔츠에 구멍이 났다.


이 모든 현상이 다소 샤머니즘적이지만 그와의 관계가 이제 전부 단절됐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자유로운 기분.



"있잖아, 나는 나랑 걔 입장을 모두 이해해. 근데 어쩔 수가 없어. 이건 진작에 끝냈어야 했었어."

라고 말했을 때, 들려온 대답은 이거였다.


"걔가 너 가스라이팅 한 것 같아."


이상했다.

동이는 항상 헤어질 때 내가 걔를 가스라이팅 했다고 욕했는데.


"근데 동이는 내가 걔를 가스라이팅 했대."


"등신. 그게 가스라이팅이야. 너 연애할 때 초반엔 좋았지? 근데 점점 어떻게 됐냐? 네가 걔 눈치 엄청 봤다며. 아무리 순화하고 돌려서 말해도 어떻게든 건덕지 잡아서 너한테 존나 지랄했다며. 그리고 맨날 밥먹듯이 헤어지자고 쳐 말하고 니 친구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남자가 정상이냐? 정신 차려. 뭔 가스라이팅이야. 그리고  회피형 남자를 누가 만나주냐. 난 20대 젊은 여자가 니처럼 이렇게 남자 하나 못 잊어서 헐떡거리는 게 더 미스테리야..."


"그때는 걔 엄청 좋아했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을 누가 말려. 못 말려. 팔이 참 귀여웠는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지쳤다는 건 노력했다는 증거.

나는 헤어지는 그 순간에 갑자기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받으며 정신이 맑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마등처럼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장면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추해질 수가 있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저렇게 변해버렸구나.

모든 미래엔 항상 그가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가진 그와 함께하고 싶진 않았다.


역에서 헤어질 때 볼에 살짝 뽀뽀해 준 걸로도 수줍어하던 남자.

한땐 우리도 서로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그 영원하다는 말이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이름을 다정하고 유치하고 야하게 부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덕분에 나도 남들 다 하는 연애 다운 연애를 한 번 해봤다.



결론적으로, 그가 매번 내게 표했던 사랑은 모두 진심이었겠지만

헤어지기 직전 싸우는 순간에 그는 그 진심 같은 사랑을 회수하듯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배려가 없는 남남과 싸우듯 유치한 말들.

창피했다. 내가 저런 사람과 만났다니.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좀 더 기운이 남아있을 때 욕 한 바가지 해주고 차단할걸.

나 정말 힘들었는데.

으레 말하는 호구 같은 사람이 나일 거다.

그는 내가 제일 문제라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노력도 자기 혼자서만 하고 있다며 성질을 냈지만

나는 당시에 그 말을 듣고 다소 속상했어도 알고는 있다.


그는 결국 시간이 지나 내가 한 짓이 무슨 행동이었고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고 후회할 거라고. 내게 엄청 미안해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언니들이 버린 거 줍지 말고

내가 고치려 하지 말고 남이 고치다 버려놓은 거 주우라는 말이 있던데.


아마 그는 절대로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연락이 올까 봐 무서워서 차단해 놨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 간혹 나를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우리도 분명 그 향수보다 특별했던 때가 있었는데.


거진 2년간의 사랑이었다.


그가 했던 사랑은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당시에 했던 사랑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가 앞으로 견뎌내야 할 시간들이 많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랬었으니까.



그러니

당신 부디,

성숙한 사람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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