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열 Sep 30. 2023

죽어버린 남자친구

알면서도 사랑에 다쳐주는 버릇

 1.

     나는 이전에 사랑보다 큰 힘을 가진 것은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어떠한 물리적인 힘도, 형체도, 더군다나 위협적이지도 않은 그것이 무슨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머리에 충격이 조금도 완화되지 못하고 직격으로 맞은 기분을 느낀다.

  


     모성애가 그랬다. 모친은 뒤틀린 모성애를 내게 올바른 방법으로 표현할 줄 모르는 여자였고, 나는 멍과 피를 가까이 하며 살았다. 분명히 모친은 나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데 자꾸만 외롭다고 느꼈다. 그러니 나는 사랑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는지에 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있지도 않은 사랑을 본다거나,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더 큰 문제점은 폭력성이 강한 남자에게서 사랑을 찾았다. 그것이 내게 가장 익숙하고 가깝게 받아왔던 사랑이니까. 그러한 와중에 만나게 됐던 그 애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줬고, 그와 연인이 되기까지 정말 고된 시간을 보냈었다. 단지 뭔가 '뭔가 느낌이 달랐다'는 이유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포장하며.  



     사랑은 나 같은 불안정한 사람에게 매우 위험한 감정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상황 판단을 올바르게 해 줄 수 있는 눈을 가려버리고

사람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 주범이었다.

때론 괜찮지 않은 것들도 괜찮다고 만드는 명분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강한 힘이 뒤틀린 사랑으로 다져진 것이라면 그렇게 위험한 것도 없다.



사랑은 마치 술 같다.

그래, 사랑은 술이다.

마취제.

마약.




2.

     나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흔하게 난무하는 MBTI,

낯선 사람과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 만만한 대화 수단인 게 MBTI.



아무리 성격유형이 T가 90%가 넘는다 한들 나는 누군가와 내 감정 상태에 대해 나누고 싶었고,

부모님과 못해본 유대감을 누군가와 쌓아가고 싶었다.

여자든 남자든.



     비단 연애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원했던 건 해달라는 대로 컴퓨터처럼 1차원적인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적인 교류를 하고 싶었던 건데.




성격유형이 그와 나는 정확히 일치하단 이유로 서로 무심한척하면서도 대화는 계속 나누는 등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언젠가 지속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고백을 해왔다. 정확히는 '사귀자'의 뉘앙스가 아닌, '나 사실 너 좋아하는데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내가 말하고 싶었어서.'의 의미에 더 가까웠다.





3.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내게 약속했던 것처럼 좋아해 주진 않았다. 사귄지 일주일 정도가 지날 무렵부터 첫 카톡을 밤이 되어서야 받는 날이 많아졌고, 내가 먼저 카톡하는 날이 9할에 가까워질 정도가 되자 나는 겉으론 '연락보단 다른 일이 중요하지'라고 말하면서도 사실 속은 외로워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을 때, 그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한 번도 정확히 기억한 적이 없었다.

또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카톡을 길게 보내면 읽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와 했던 대부분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나 사실 너 카톡 제대로 안읽었거든?"이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한 것은 짝사랑이었나. 좀 속상하고 슬프고 억울했다.



     사귄지 1년이 넘어갈 때쯤 간혹 본가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이거나 잘 곳이 없는 날에는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곤 했는데, 다른 친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나를 등지고 누워도 별반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음에도 그가 나를 등지고 누우면 그게 그렇게 서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운할 일도 아닌데, 그때는 지금까지 봐왔던 외로움과는 전혀 다른 어떤 형태의 외로움을 보아서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런 문제라면 잘 견딜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해오던 사랑과 비슷했으니까. 그렇게 믿었다.



4. 첫 번째 헤어짐.


헤어짐이라는 것에 관해선 매우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연인이 되기로 시작한 날부터 '이 사람은 나와 영원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은 내게 어떤 면을 보고 정 떨어지게 될까.' 따위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시작해서 점점 앓게 된다.


단순히 '이 사람이 생각이 많아서 걱정도 많네'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이 문장을 읽고 당신은 뭔가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그렇다. 나는 공포-회피형 양가적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내게 "넌 이별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안전장치라곤 줄 하나 밖에 없는 상태에서 하루에 한 층씩 건물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헤어지는 날에 끈이 끊어져 추락해버리는 어떤 한 사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시 사귀었던 애는 회피형이 심한 아이였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여러 번의 헤어짐을 속으론 미쳐버렸으면서 결국엔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늘 내가 시험을 앞둔 날, 기말고사, 반수, 자격증 시험 등등 시험 기간에만 이별을 표했다.

마치 내가 열심히 계획하고 노력해 온,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망하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체구보다 큰 울음소리를 내면서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헤어진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때 친구가 했던 말.

"회피형 남자 진짜 질색이야. 그리고 너 가스라이팅 진짜 세게 당했구나.'

나는 그 말을 다른 친구에게서도 여러 번 듣고서야 '아, 그가 회피형이었구나. 이게 가스라이팅이구나.'알 수 있었다. 회피형인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학습이 그렇게 느린 거다.




5. 그가 했던 약속.

      그는 별 것 아닌 일로 헤어지자고 말하거나 잠수를 타고 차단을 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5번 어길 동안에도 난 그 안에 그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너는 나랑 영원히 보기로 했으니까.'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예외를 부여했다.

이건 내 잘못이다.


속으로 나는 학습능력이 없는 여자라고 자학했다. 그 날만큼은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고 미련도 나보다 더 이렇게 미련한 여자는 이 세상에 아마 없었을 거다. 당시를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내가 그때 왜 그랬지. 진짜 마약이라도 했었나 싶다.



그는 헤어질 때 이런 말들을 내게 말했다.

"너만 잘하면 돼."

"니가 헤어지게 만든거야."

"난 너한테 미안해하지 않을 거야. 너도 요구하지 마."

"한 번 헤어지면 그 뒤는 없어. 사람도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 다시 못 돌아오는 것처럼."


나는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는 오히려 그가 잘못한 건데, 내가 잘못해서 헤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이별해야 했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그를 정확하게 사랑해주지 않아서, 내 사랑이 그에게 바로 전달이 못되어서 그런 줄로 알았다. 모친이 내게 했던 것처럼.



만일 내 애인이 바람이 났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가 바람이 난 거란 논리를 가진 불건강한 정신상태였으니까.



6.

     죽음을 연습했던 적이 있었다. 자살하려고. 자살이 두렵지 않으려고. 나는 그와의 헤어짐도 스스로 연습하면 헤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이별을 연습했다. 연락의 횟수를 점점 줄였고, 그는 전혀 이상해하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그러면서 그를 정중한 손님처럼 대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뇌까렸다. '오늘은 헤어지자고 말해야지.' 그러길 달포쯤 지났을 때였나. 기말고사 사흘 전에 나는 그간의 짐처럼 느껴졌던 이별을 한 순간에 단호히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게임할 때도 못하면 최선이라도 다해야지. 솔직히 내 친구들이랑 같이 롤 할 때도 너가 내 여친이면 내 기 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게임이 내 실력이 형편없는 걸 어떡하라고. 그게 최선이었는데. 그래서 니 친구한테도 전화와서 사과했잖아.

     그: 아~ 그래서 니가 잘한 거라고? 야. 건희(내 친구 이름)라는 분 이 카톡방에 초대해봐 . 니 행동이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물어보자.



나는 게임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기적인 조작에 능하지 않는 사람이 롤이라는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때에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일반 게임에서 내가 잘 하고싶다고 어려운 챔피언을 픽해놓고 자꾸 죽자, 더 이상의 죽음을 막는 편이 게임 승리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우물에서 죽치고 있으면서 아이템을 바꾸고, 미니언이 집에 들어오면 그걸 먹으며 버티고 있던 상황이 잘못된 행동이라며 그의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다 사과하라고 그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 플레티넘 구간의 사람들 사이에 브론즈, 실버 실력이 되는 인간이 끼어있으니 메커니즘에서 차이가 나는 그런 불상사가 나버린 것이다.


나는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장기를 둘 때, 초심자가 초반 진영을 깔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아직 배운 적이 없구나'라고 알기 때문에. 하지만 난 그런 초심자를 보고 한 번도 '쟤는 자살수를 두려는 건가?', '쟤는 장기를 저렇게 했으면서 아직도 두뇌회전이 안되는 아이인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난 그와 게임 때문에 싸움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가 과거 얘기를 들먹이면서 게임 얘기가 나와버린 것이었다.



게임이라는 원초적인 즐거움의 수단이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했던걸까 내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근데 랭크도 아니고 일반게임이었는데.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저렇게 어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나.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그가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우리 관계의 전적인 노력은 나 혼자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대체 뭐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같다.




결국 그 날 친구와 셋이서 대화를 하고 바로 말했다.

헤어지자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이라고 보내놓고 내 친구에게도 "얘가 헤어지자네요"라고 보내놓고 내 모든 연락처를 다 차단했다.

저 말의 의미는 뭐였을까. "지가 잘한 것도 없으면서 주제를 모르고 헤어지자고 말하는데 빨리 편들어주세요" 뭐 이런 뉘앙스였으려나.

나는 그 관계에 다시 한 번의 정이 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도 그가 내게 평소에 지나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진작에 알아차려야했는데.


사람이 참. 유치하고, 어리고, 어쩌면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였지 않았나 싶다.

그는 내 노력 밖을 벗어났다.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포장하며 덮어보려 해도 그는 정도를 모르고 선을 한참을 넘었다.




7.

이별 당시의 나는 굉장히 초연했다.

스스로도 놀랐다.

별거 아니구나.

오랜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드디어 문드러진 속이 다시 회복의 시작점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내 스스로에게 굉장히 미안했다.

너무 막다룬 것 같아서. 내 감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구나.

사랑은 나 같은 사람이 하기엔 정말로 위험한 힘을 가진 감정이었다.


'이래서 외로울 땐 연애를 하면 안된다는 거구나' 몸소 체감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손을 씻을 때마다 약지에 끼워진 커플링에 비누가 낄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가 자꾸 우리집에 있는 휴지를 아낌없이 막 쓰는 것에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자기 전에 화장실 문은 꼭 닫아달라는 요청을 매일 밤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용량만 지독하게 차지하고 음식물쓰레기 같이 느껴졌던 그의 사진들을 미련없이 지워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젠 더이상 오늘은 헤어지자고 말해야한다는 다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시험 기간엔 이제 기복이 더이상 없겠구나, 이제 사람과 마찰이 한동안은 없겠구나 안심할 수 있었다. 


식중독에 걸린 날 잘못 먹어서 모두 게워냈을 때의 딱 그 개운한 느낌이었다.


매번 헤어지면 가장 먼저 붙잡던 사람이 내쪽이었으니 이번에도 붙잡을거라 생각했던 전남친은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자 적잖이 당황한 형색이었다. ‘이쯤이면 연락 와야하는데’라는 생각을 했겠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관찰을 하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떨지 눈에 선하다.




8.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


토요일 새벽 4시 57분. 토요일에 학교 특강이 있어서 전날 일찍 잠들었는데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 여보세요.

그: 인스타 너야?

나: 누구세요....

그: 누군지 알텐데?

나는 번호를 재차 확인하고 전남친임을 알 수 있었다.

예의를 밥말아먹었나.


어떻게 전화를 했을까.

생각해보니 헤어진 당일 차단을 해놨으면서 안한줄 알고 며칠 뒤 한 번 또 차단한다고 눌러서 차단 해제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지. 난 바보다.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걸려오는 두 번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삶이 힘들어서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맨정신에 게다가 새벽에 전 애인에게 전화해서 '인스타 너야?'라고 말하다니.

혹여 누군가가 내 사진을 도용했나 싶어서 문자를 보내봤는데 무슨 일인지 전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비꼬는 웃음을 하며 "미안하다잉 너랑 관련이 전혀 없는 일이야. 다시 자 ㅋㅋ"라고 한다. 나는 그 특유의 짜증나는 저 말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거진 2년간의 사랑이었는데, 그 말투를 모를리 없다.

수험생활을 할 때 잠을 깨는 방법 중에 화가 나면 잠이 깬다고 했는데, 그 주장이 입증되는 날이었다.


"니가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안받았으면 다음 날 부재중 전화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갔겠지. 근데 그게 아니잖아. 내가 깨서 전화를 받았잖아. 끌어들여놓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왜 안알려주는거야."


이런 반복적인 말들로 화를 내며 집요하게 물어본 끝에 사건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의 어이없는 사고방식에 나는 내가 선택한 이별에 관해 매우 합리적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창피했다. 비참해지려 했다. 저런 사람을 좋아했다니. 저런 사람 때문에 내가 안하던 짓을 했다니.


그는 우리의 대화가 끝난지 20분이 지난 후에 다시 전화를 해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진심일 때 나오는 말투를 잘 알고 있다.

실로 양심이 없다. 그에게 준 마음들을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처참히 부숴놓고 짓이겨놓고 본인이 마음 편하자고 갑자기 헤어진지 3달이 넘어가는 시점에 용서를 바란다니.


그는 사람을 좀 많이 만나봐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날부로 나는 그에 관한 모든 부검을 마쳤다.

모든 연인들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만났고, 어떤 추억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었는지.

나는 그것들을 확인하려 그와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날, 더이상의 부검은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는 완전히 뒤져버린 거다.

우린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으며, 너는 첫 번째 헤어짐 당시에 사람이 죽으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듯, 넌 죽어버린 거고, 우리의 재회는 없을 거다.




9.

너의 흰색 티셔츠. 내가 입으면 원피스가 되는 그 티셔츠. 매일 뿌리고 나가는게 루틴이었던 향수, 다이어리에 언제 끼워놨는지 모를 같이 찍은 사진들.

어떤 선물은 그 선물을 준 사람 보다 더 오래 남는다. 그의 흔적들을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그 물건들이 그가 선물해준 것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쯤이면 조금은 슬퍼진다.

분명 우리가 그 사진보다 가까웠고, 티셔츠보다 당연했으며 향수보다 더 특별한 사이였더 때가 있었는데.


받고싶던 그 선톡.

"뭐 해?"라는 타자를 치는게 그렇게도 어려웠던 사람.

사실 헤어진 첫 날은 조금 울었다.

듣고싶던 그 한 마디 때문에.


연애할 때 연락 안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저거 한 마디 정도만 한 번만이라도 해주지.

나는 왜 그 흔한 말을 듣고 싶어했나.



 

10.

그저 홍역을 치른 것이다. 남들 다 한 번씩 해봤다는 그거. 나는 홀로 내 상태를 보살필 의무가 있었다. 혹여 나중에 연애를 할 일이 생기거든, 그때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있기를.

또, 내게 미안해하지 않을 남자를 만나게 되기를.

사랑이 내 모든 썩어문드러진 속을 구제해줄 거란 기대는 동화같은 유아기적 머저리식 상상이었다.

난 이걸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그에 관한 글은 낭비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이 아프지 말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나도 대단한 위인은 아니지만

이 얘기가 꼭 하고 싶어서.

작가의 이전글 혼자일 때 더 빛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