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가서 살고 싶다
요즘도 그럴진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땐
구구단을 초등학교 2학년 때 외워가야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문제를 아예 풀지 못하는 구조였으니 모친은 흔히 말하는 선행학습 같은 예습을 12월 겨울방학 내내 시켰다.
9곱하기 9는 포도잼
2곱하기 7은 레몬에이드
2곱하기 9은 건포도
2곱하기 5는 버터가 발린 식빵
5곱하기 5는 통 식빵
모친이 돌발적으로 묻는 구구단에 웬만하면 잘 대답했지만
간혹 나도 모르게 멍을 때릴 때
모친이 “9곱하기 9는?” 이라고 물으면 나도 모르게 포도잼이라고 몇 번 잘못 말했다가 하마터면 정신병원에 갇힐 뻔했다.
내 주변엔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을 뿐더러
담임 선생님도 날 이상하게 생각해서 나도 내 존재에 관한 혼란함이 꽤 잦게 찾아왔다.
”해열, 이거 너도 마실래?“
“뭔데? 줘봐.”
“입 벌려”
러시아에서 온 그는 도수가 높은 술을 꽤 잘 마셨다.
그는 내가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입을 ‘아-’벌린 사이에 데낄라를 들이부었다.
처음 마셔본 그 맛은 식도가 타는 맛이었어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토하듯 뱉었다.
“씹할. 뭐야 이 전구 같은 맛은.“
“푸핰ㅋㅋㅋㅋ데낄라야. 너 처음 마셔보는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애들이 쓴 술을 참 잘 마셨다.
“근데, 너도 사물이나 느낌을 색깔로 표현하고 그래? 전구 같은 맛은 어떤 거야?“
“아, 공감각을 갖고 있어서 간혹 이해 안되는 말들을 좀 해. 몰랐겠지만 숨기고 산 지 좀 됐어.”
“알아. 그런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지리네. 나도 공감각자야. 나한테 데킬라는 뾰족한 맛임.”
생각보다 외국은 우리나라보다 공감각자가 많은 것 같았다.
공감각자와 이런 사물에 대해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밤새 해가 뜰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간혹 둘 다 모르는 단어가 생기면 사전을 뒤적이거나 번역기를 쓰느라 대화 맥이 끊겨도 상관이 없었다.
대문자 A는 오렌지색이고
브라우니는 숫자 9번이야.
이빨을 뽑을 때 치과에서 물려주는 솜은 흰색 맛이야.
오르가즘은 회색빛 도는 푸른색이고
자위할 때 느끼는 절정은 파스텔톤 하늘색이야.
피아노는 우물이야.
이때 그는
나한테 A는 핑크색
오르가즘은 주황색이었던 것 같은데 자주빛도 돌았어.
피아노는 쌍둥이야.
나 근데 tangle 이란 단어는 보라색으로 보인다? 넌 어때?
우린 같은 사물을 다르게도 표현했지만 듣다보면 어느정도 그럴싸해서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인스타에선 이런 짤도 있었다.
아마 내가 이렇게까지 신나하는걸 그는 처음 봤을 거다.
’한국엔 공감각자가 보편적이지 않아?‘라고 물었다.
나는 격하게 끄덕였다.
그래도 대충 말하면 공감각자가 아니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과외 선생님께 갈비탕을 국어 자습서 맛이라고 떠들었던 적이 있다고 했더니 그가 막 웃는다.
외국엔 공황장애도 적지 않게 어느정도 있었던 것 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공황장애에 대해 어떤 병인지 알고 대처에 능숙했다는 것.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화장실에서 상태가 이상해서 못나가겠다는 내 말에
괜찮을 것이라고, 안괜찮으면 언제든지 구급차를 불러줄 수 있으니 안볼테니까 괜찮아지면 나오라고 말한 그녀들.
외국에 가서 살고 싶었다.
한국에선 생소한 것들이 외국엔 널려서.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