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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Oct 20. 2023

외모지상주의와 어떤 힘없는 권력

난 아무래도 나르시시즘에 걸린 게 틀림없다.


어느 날부턴가

책을 아무리 읽어도 멍청해지는 것 같다는 기분과 함께

거울을 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누군가 찍어준 내 사진을 보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나르시시즘이 생긴 걸까.


학교를 다닐 때나 지금이나

화장실 거울, 손거울 이런 걸 보며 죽치고 앉아있는 여자애들이 제일 한심해 보였는데 내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자꾸만 누굴 이해하게 되어야 했다.

모친이 그토록 한심하게 말하던 전문대를 어느 순간 내가 다니고 있고

정신 병원엔 한심하게 살다 미쳐버린 인간들만 사는 곳이라 했을 땐 얼마 안 가서 내가 거길 들어가고.

여자 학생들이 길에서 교복을 줄이고 화장을 떡칠하며 앞을 안 보고 거울 보며 옆에 남자애와 담요를 끼고 다니는 걸 보며 꼴불견이라고 할 때 내가 그 짓을 하고 있고.

뉴스에 랜덤채팅 문제가 나오면 하여튼 ”저것들이 문제야 “라고 해도 내가 그걸 하고 있는데.


처음엔 모친의 빌어먹을 업보를 내가 대신 닦아준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모친의 그 빌어먹을 사고방식을 고쳐주겠답시고 나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근데 부모의 세상이 곧 애들이랬나.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온 저 말들이 곧 내 생각이 되었다.

공부 안 하는 사람은 한심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가는 대학교가 전문대구나.

정신병원엔 뇌가 없고 말도 안 통하는 미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길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 여자애들은 커서 잘못되겠구나. 하며


근데 그 짓들을 내가 하고 있다.

그리고

머리론 틀린 걸 알지만 마음이 안 움직일 때가 있다.


“예뻐지셨습니다?“

“제가요? 고마워요.”

“너님 기억나십니까? 내가 너 예뻐질 거라 했잖아.”

”기억 안 나요. 어떻게 아셨는데요? “

“그야, 그때 너님은 꾸밀 생각이 없으셨으니까.”

“너님 다운 일차원적인 생각이네.”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도 화장실에서 10분 이상 죽치고 있진 않아요.”



예뻐졌다는 말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았던 상태라 별로 귀담아듣진 않았지만

거듭되는 같은 말을 들을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빠르게 변하는 내 모습을 나조차 못 따라가는 듯했다.

자존감이라도 높여보자고 시작했던 화장, 사치를 위한 쇼핑, 건강한 운동, 과한 미용.

조금 색깔이 있는 렌즈까지 끼면 당신들은 다가와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지.



처음엔 ‘이제야 좀 길거리에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처럼 생겼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예쁜 사람이 아니라, 몇 년 전의 나 보다 지금의 내가 좀 더 볼만 해진 거니까.

그런데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 할수록 가속도가 심하게 붙어서

어떤 날은 이게 정녕 내 얼굴이 맞긴 한가? 싶은 생각에 계속 보게 된다.

볼만 해졌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늙으면 반납해야 하는데 말이지.



언젠가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걔: 안녕. 너 나랑 동갑이라며? 와 근데 넌 예쁘다는 말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겹겠다.

나: 무,뭐?? 뭐라고?? 내가?? 아니야. 뭐라는 거야.

걔: 고장 난 거 졸귀네. 칭찬 들으면 고맙다는 말만 잘하더니. 입력값이 달라?

나: 짜증 나게 놀리네. 그리고 꾸미면 뭐 해. 지우면 다른 사람인데. 다시 되돌아가는 기분일 거 아냐.

걔: 아니지. 여자들은 다 꾸미니까 그럴싸한 거야. 그 정도 노력이라도 하니까 인싸인 거고.

나: 어째 너가 나보다 여자를 잘 아는 것 같냐.

걔: 난 너처럼 범생이는 아니었으니까. 대신 여자들을 얻었지. 세상은 외모지상주의란다. 요즘은 예쁜 게 권력이고 그걸로 돈도 벌어. 아가야.

나: 동갑인 주제에 아가는 무슨. 넌 못생겼어.



사람들은 이상했다.

첫 모습만 보고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지, 내가 이상한걸 수도 있다.

내가 사피오섹슈얼이라서,

(아마 내 안목이 거지 같다고 평가받는 주범이겠지.)

내가 머리가 좋고 똑똑했으면 좋겠어서

머리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멀리하고 싶어서

무언갈 배우는 대신 외모엔 신경을 안 썼을 수도 있다.

근데 요즘은 똑똑한 사람 보단 예쁜 사람의 권력이 더 세다.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내 환경이 이전과 전혀 다른 곳이라서 나 혼자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공짜로 얻는 친절. 당신네들보다 나이가 어려도 놓지 못하는 너희 존댓말. 대가가 없는 선물.

난 독립적인 성격의 인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옛날의 나보다 지금의 나를 더 좋아한다.

화장으로 모든 걸 다 가려버리는 마법.

이게 무슨 의미가 있었나 회의감이 들어서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한 달 정도 이러고 다니니

당장 나조차도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놀면서 이러는 게 더 재밌다.

바보가 되어가는 게 느껴지는데도.

니미럴.

늦게 들어온 바람이 더 위험하댔지. 그래, 그랬지.



세상은, 내가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들어왔던 세상의 그 어떤 흉악한 말들보다

훨씬 더 넓고 내일도 하루만 아니, 일주일만 더 살고 싶게 만들고 재밌는 게 판치는 세상이었다.

난 대체 뭐 하면서 살았던 거지.

어렸을 때 맨날 라푼젤이라는 비꼬는 별명을 들어왔는데.

난 그들이 이해가 됐다.

맨날 타인들을 이해하며 사는 나.

그럼 나는 누가 이해해주나.




무엇보다도 내가 기분이 정말 좋았던 것은,

공황장애가 발생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내가 숨 쉬는 공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꾸 집에서도 누군가가 날 쳐다보는 것 같다고 느껴도

‘어쩔 건데.’, ’집에선 나도 좀 쉬게 내버려두어줘라.‘ ’하, 역시 내가 뛰어나게 예쁜 탓인가.‘라고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타인의 시선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고,

불편한 상황이 생겨도 언젠간 이겨냈다.


처음엔 효과가 거의 없었는데.

난 약 없이 공황장애를 치료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 의사들은 경악하려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배워왔는데.

배우면 뭐 해.

책은 다 엉터리다.

결국 우린 모두 감정과 호르몬의 노예다.

이젠 나도 예쁜 사람 좋아해 싯펄.

아니, 예쁘고 똑똑한 사람.


그리고 세상은

외모지상주의.

이제 예쁘면 돈도 벌 수 있고

예쁜 건 권력이 되는 시대.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이런 화려한 공주놀이가 아니라

선천적인 천재 놀이였는데.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나도 빠르게 바뀐다.

지금 당장만 해도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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