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발산했고, 나는 역행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삶.
어렸을 때는 집에서도 쉬는 개념이 없었어서
억압에 인내를 배웠다.
모친은 늘 당부했다.
내가 이 집에 얹혀 사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지금도 얹혀 사는 것임은 분명하나,
혼자 살면 분명히 좋은 점도 있었다.
누군가는 자주 굶주린다 하였고
그러다 혼자 아프기라도 하면 무척 서럽다던데 그런것도 없었다.
혼자 살기에 아파도 마음껏 아파하다가 원할 때 회복할 수 있고
넘어지면 나를 쳐다보는 이도 없었고
화장실을 갈 때 소변을 잘 못 본다고 첨언하는 사람도 없었다.
옆집, 아는 사람, 지인들의 얘기에 동조를 해주지 않아도 되었고,
책을 읽고 싶거나 글을 쓰고 싶을 때 그것들을 하고
공부를 하다가 허리가 아플땐 누워서 공부를 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었으며
섹스를 하고 싶을 땐 그리 하여도 되었다.
요리가 하고 싶으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레시피를 찾아보며 재료를 사서 해먹고
귀찮아서 배달을 시켜먹으면 그러면 됐다.
덕분에 인내심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소리 내어 울진 않았다.
인내심이 퇴화 되었기에 힘든 일이 많아졌다.
힘든 일이 많아졌기에 타인의 시선 또한 신경 쓸 일이 없어진거다.
옛날에는 그 많은 시선들을 어떻게 버텼을까.
아이폰에는 이모티콘이 많았고
외국에서 만들어서 그런지 이국적인 이모지도 많았다.
이를테면, 가족의 다양한 형태라던가,
젠더에 구애받지 않는 연인의 이모티콘이라던가.
그 중, 아버지 혼자, 딸 하나인 이모티콘을 보고 그것이 후배위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이라고 정정해줬을 때 돌아왔던 대답은,
”근데 왜 둘 다 웃는 얼굴인데?“였다.
그렇지, 홀애비 혼자 딸 애를 웃으며 잘 키울 수 있을리 없지.
그래도 보통 화목하지 않아도 초등학생때 가족 그림 그리라 하면 웃는 그림으로 그리지 않나.
나는 섹스의 의미에 어떤 것들을 부여하더라도 결국엔 정녕 원초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생각했다.
sns에 관심 없던 내가(정확히는 못하게 억압받은)
인스타를 시작했던 것은 오로지 첫사랑 때문이었다. (근데 첫사랑이라 하기에도 뭐한 관계였던)
모친은 당시 그 아이에게도 내가 인스타를 시작해도 ‘좋아요’만 누르도록 지시했다. 어쨌거나.
그와 얼마 안가서 헤어지고 나는 고3이 되고 성인이 되고 이듬해에 어려운 인스타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만 최근 들어 인스타를 정말 많이 하는 이들을 만나
많은 이면들을 보았다.
허세가 가득했던 그 피드들은 결국 가짜란 것을.
그런데 그들은 공황장애가 없어보였다.
결국 사진 속이라 그런걸까.
놀랐던 점은,
인스타그래머들은 모두 부지런했고,
어떻게 하면 예쁜 사진이 나올지 잘 알고 있었으며
사람이 피드 주인공일 경우엔 모든 포즈들 하나하나가 꽤 힘들었단 것이었다.
또, 한 장만 찍고 마는 줄 알았던 사진은 꽤 여러장을 찍어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난 아직 세상물정을 알려면 멀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