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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Jan 30. 2024

야한 강아지

1.

사주에 애를 낳다가 죽은 처녀 귀신이 씌였다고 한다. 나는 점쟁이의 그런 미친 소릴 듣고 제법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왜 내가 남자 복이 이리도 지지리도 없는지 납득이 가기도 하고,

왠지 나도 모르게 봐주는 사람들의 점을 그렇게 봐줄 수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서.


모든 일은 내 예언대로 흘러갔다.

그렇게 이모부를 떠나보냈고, 친구는 천식에 걸렸고, 친구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묘를 불편해하셨다.

나는 그렇게 점을 그저 일기예보처럼 알려주었다.

미리 준비하면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고, 조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그런것들은 정말 일기예보 같은 것이라서,

비가 올 것이라고 비를 햇빛으로 바꿔주진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리 우산을 챙겨 나가는 것 뿐이지.




2.


남자들은 섹스 파트너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여자도 파트너와는 연인이 될 수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그런 관계에 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고,

남들 앞에서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으면서 정작 속으론 기피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몇몇 여자인 친구들이 파트너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어떻게 좋아하게 될 수 있는 것일까 늘상 이해할 수 없었다.




3.

외로웠다. 겁나 외로웠다.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내가 지금까지 늘 해온 것이니까.

그러나 집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라던가 가정불화, 20살이 되던 해의 나의 입시 실패, 풍비박산 난 집 분위기 등등

감정이 썩어문드러져 겨우 버티고 있던 나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랜덤채팅 어플을 중독적으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대신 나를 몰래 죽여줄지.

나는 매번 멍한 눈을 하고선 이런 기대들로 사람들을 의미없이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떤 사람도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조차도 해결 못하는 문제를 누가 해줄 수 있을리 없었다.



마약, 약물남용, 외도, 인터넷으로 만나는 여러 여자들과 성관계, 가학적이고 능숙한 변태짓, 직설적인 발언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분명 그는 내게 친절을 베풀었지만

간혹 당당하게 성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매번 얘 앞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 기준에서 그는 실로 부도덕한 사람이었으며,

윤리적인 관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사람이었고,

지금 내 현실에선 도저히 엮여볼 수가 없는 카테고리의 인간이었다.


랜덤채팅에서 만나는 남자들이 모두 다 그렇듯, 그 또한 거짓말에 능했고 겉과 속이 달랐다.


숨기는 것은 없었지만 비밀로 하지 않았고, 내가 물어보는 대부분의 것들은 거짓말로 대답했다.

그러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묻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딱히 상관 없었다.

내가 필요했던 건 그냥 내 주변에 있어줄 사람이거나 날 죽여줄 사람 둘 중 하나였으니까.



그가 베푸는 친절은 정말 감쪽같아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평소에 거친 세상만 봐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확실한 건, 그는 날 좋아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꼭 애견카페에 있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혹시 이 사람이 날 만나기 싫은데 미운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불쌍하니까 나랑 놀아주는건가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가 호스트바에서 일했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역시 몰래 애견 카페 강아지를 떠올렸다.

피곤하지만 손님맞이를 하는.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그는 내가 물어보는 대부분의 말에 웃음 없이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당시 유독 여자 아이들과 인간관계가 어려웠던 나는 어떻게 하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그에게서 배우곤 했다.

또, 좋고 싫음에 관해서 말을 못했던 내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함께있는 4시간 만큼은 내가 ‘네, 아니요’ 혹은 ‘싫어요’는 거절은 할 줄 알아야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음식점을 가면 메뉴를 소개만 할 뿐 선택은 내가 하도록 하게 했다. 그는 내 자존감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왔으나 정녕 자존감을 올릴 수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4.


언젠가 그가 나를 외진곳으로 불러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얘를 볼 때마다 낯을 가렸고, 그는 늘 이걸 배려해준다고 앞장서서 걸으면 나는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 이런 잔소리를 한다.

따라오라고 진짜 여기까지 따라오면 어떡하냐고. 중간에 도망갔어야지 어린 아가씨가 겁도 없냐고.


그런데 나는 이게 도저히 잔소리로 들리지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나한테 이런 말 안해줬는데.

또한 나는 그와 절대로 감정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나는 그 뒤로 내 감정을 철저히 숨겼다.

몸 좀 섞으면서 잔소리 하고 조금 잘해줬다고 마음이 붙어버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없다.

그때의 내 상황은 마치, 학교에서 소외되는 아이한테 조금 잘해줬다가 고백을 받아버린 상황의 그 아싸를 맡는 상황인거다.  

창피했다. 이런걸로 사랑에 빠졌다고 말을 못한다.

사탕 하나 준다고 쫄래쫄래 따라가는 것 같아서.

나만 아는 비밀.




결국 다른 의미로 비밀친구가 되었다.

서로 필요한게 있어서 찾는.

일반인의 범주에선 생각할 수 없는 오만가지 흉한 일들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서로의 시체도 못찾는 사이. 서로가 죽어도 안부를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전화번호는 더더욱 모르고.

나는 간혹 내가 언젠가 자살을 했을 때 경찰이 그에게 나라는 사람을 아냐고 물으면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해가는 상황을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꼭 귀신같이 내가 혼자 죽어버릴까 싶은 날에만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러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에게 갔고, 순순히 묶이고 눈이 까마득해지고 처음 보는 옷을 입곤 했다.


그러다 내가 연인이 생기는 바람에 2년간 연락을 끊었다.




5.

남자친구와 2년간의 연애를 하고선 헤어지고 깨달았던 것이,

나는 정말 남자보는 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헤어짐을 너무나도 (병적으로)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는 거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내게 알려준 것이었다.

나는 내 몸에 씌읜 애 낳다 죽은 처녀귀신을 떠올렸다.

그래, 처녀귀신인데 애를 낳아?

그럼 미혼모잖아.

애초에 처녀가 어떻게 애를 가졌겠어 과부도 아니고.

그런 생각.


나는 그 누구도 만나면서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 어떤 사람과도 연인이 되지 말자고. 결혼은 더더욱 하지 말자고.

내가 연애를 하지 않으면 나는 그 누구와도 내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연애라는 것을 하면서 싸울 일도 없을것이다.


성관계에 관한 관념 또한 바뀌게 되었다.

이 행위 자체가 사랑의 산물을 의미한다기보단,

사랑받지를 못한 사람이 이 행위를 하면서 얻는 위안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가짜라도 유일하게 사랑이 눈에 보이는 시점이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2년만에 강아지에게 말을 걸었고, 이 아이는 반가운 표정으로 나와서 여름을 지냈다.

그런데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무렵,

빌어먹게도 나는 한 번 더 정분이 나버렸고, 그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더 자주 나를 불러내었다.

예쁘게 생긴 손과 달리 힘조절이 거친 손, 흰 머리, 귀여운 팔, 간혹 나오는 야한 반말.

간혹 내가 그와 눈을 의도적으로 맞출 때면 평소와는 매우 다른 내 눈빛을 알아챈 것인지,

매번 다시 남자친구를 만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거나, 선을 긋고 벽을 치는 말들을 자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딱히 서운하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많이 애정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사귀고 싶다거나 뭘 더 진전시키거나 그러고 싶진 않은 그런 모순적인 기분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밤마다 답답할 때 속으로 몰래 말했다.


나 체온계 좋아해요. omr카드도 좋아하고 수학도 좋아해요.

강아지, 고양이 아니, 그냥 포옹을 할 수 있거나 교감을 할 수 있는 포유류 동물들은 다 좋아해요.

인형이나 이불같은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것들도 좋아하고요, 그냥 이거 아니어도 제 정서를 부드럽게 만져줄 수 있는 것들은 다 좋아해요.

그런데 체온계랑 포옹을 할 수 없고, 강아지랑 섹스를 하거나 인형이랑 결혼을 할 수는 없듯, 너랑도 뭘 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아해요.

거의 매일 널 생각하고 있어요. 참아보려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대부분의 모든 책엔 네 이름이 적혀있어서 벗어나지도 못해. 아무것도 안해도 옆에 두고 싶고 내 머릿속에서 몇 번씩이고 널 납치해.



6.

시간이 늘어지고 겨울로 접어들던 날 내 생일엔 첫 눈이 선물처럼 내렸다.

나는 장난으로 수면제를 먹고 헤롱거리던 그에게 '나 신발사줘요!'라고 했을 때 정말로 바로 사주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랐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때를 기점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친밀해졌다.

그는 이직을 준비하면서 거듭되는 면접을 준비하느라 우울한 상태였고, 나는 국시를 준비하면서 불안정한 심리상태였으니 서로가 의지한 꼴이었다.


사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나보다 지혜롭고 똑똑해서 내게 대단한 조언을 해줄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줄 사람.


4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우리집에 처음으로 데려오던 날엔 너무도 어색해서 그가 꼭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온 아이 같았다.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얘를 좋아했던건, 이성적인 마음이 아니라 모성애 같은 것이라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아지라는 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그렇게 너의 밥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겨주곤 했다.

사람 나이로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어린 아이 같은 내 새끼.

국시를 합격하고 나는 고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기쁜 마음에 그에게 부모님보다 먼저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 뒤로 기분이 좋을 때마다 상습적으로 '넌 내 핏덩이'라고 말을 했을 때, 그는 꽤나 어이 없어하는 눈치였다.



7.

서로가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그에 대한 정보량도 늘어났다.

내가 친구들에게 점을 봐주고 남들에게 실없는 소리로 예언을 하듯이,

그의 주변에 다른 사람이 보였고, 그가 알려준 나이가 거짓임을 직감했다.

왕복 세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그는 왔다갔다 하면서 종종 우리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자고 가는 날엔 아기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던 날이 있었다.


결국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였고,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들리고 말았다.


아까도 말했듯,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 뿐, 곧 내릴 비를 햇빛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의 반쪽짜리 사주를 봤다.

대충 봐도 그의 사주가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우리 둘이 술에 약을 타먹고 그가 먼저 잠들었을 때, 나 혼자 남겨져버린 날이 발생했다.


나는 술과 약기운이 도는 것을 느끼며 맨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의 핸드폰을 내 마음대로 열어서 고양이 사진과 야동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고양이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아이 사진이 있었다. 나는 보면 안될 것을 봐버린 거다.

씹할.

그의 나이도 내가 알던 나이보다 4살이 더 많았다.

그제서야 사주가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살다보면 이혼 할 수도 있는거지.' 하면서.

아니, 사실 그건 거짓말.

나는 그 충격을 홀로 감당해내느라 일주일 동안은 모든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늘 그래왔다는 듯 감쪽같은 눈웃음과 감쪽같은 포옹을 하면 그새 잊혀졌다.

쓰다보니, 나라는 사람은 정말 단순하고 바보같음을 넘어서 호구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8.

예전에 인상깊게 봤던 웹툰에서 엄마가 아빠되는 사람에게 '책임지는게 두려워서 친자확인도 안하고 있는거잖아!'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렸어서, 저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직 사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 알고 싶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어봐놓고서 '아냐, 대답하지마.'라고 성급히 그르치는 상황들.

그때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상황들이 알것도 같았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애가 있는데 이혼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우리집에서 몇 번 자고 간 것이 이해가 되니까.


그런데 어느날 그의 중고 어플 계정을 보여주며 온도가 몇 도고, 요즘 게임팩을 판다고 했던 날,

나는 나도 모르게 직감적으로 유부남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들이나 아저씨들이 풍기는 그런 뉘앙스. 조금 짙은 파란색 냄새. 옷장 냄새.


헤어지면서 그를 집에 돌려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그의 계정을 찾아냈을 때, 나는 이젠 정말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으로 진지하게 진위를 물어볼까 하다가 결국 만나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나는 이전에도 그랬었듯, 또 일주일간 먹은 것들을 체하고, 잠도 못자고 옷장에도 자주 갇혔다. 의사는 이런 내 상태를 보고 평소에 먹던 약의 복용량을 조금 더 늘렸다.


내 몸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게 내 정신 건강에 더 나았으려나.

무슨 생각으로 그를 더 알고 싶어했던 걸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숨기는 데엔 이유가 다 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더 알아내지 말았어야했다.



9.

그를 만난 날, 나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예감했으면서 손은 모순적이게도 콘돔 두 박스를 구입하고 있었다.

일주일간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으니, 결국 그 날 그와 퇴실 시간 넘게 낮잠을 평소보다 더 오래 잘 수 있었다.

저녁 또한 그 혼자 먹이고 나는 그 앞에서 구경했다.

그가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볼 때까지도 나는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걸 물어보는게 맞는 걸까'

그리고 그때 그 드라마 대사가 떠올랐다.

'아냐, 대답하지 마.'

머릿속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거였다.

"나 이따가 물어볼게 있어요."

눈치빠른 우리 강아지.

그는 내 말투가 평소와 다름을 느꼈는지 겁을 먹는다.

"가기 전에 물어봐요. 지금 말고요."


나는 그가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4년을 만난 그때까지 그의 나이와 사람 두 명을 숨길 정도로 감쪽같았다.

신기가 그렇게 밝은 나를 속일 정도로.


그가 어떻게 대답하든, 거짓말을 하건 진실을 말하건 지금 물어보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로 속아주고 믿어주겠다고 말했다. 혹시 법적으로 싱글이냐고 물었다.

나는 동시에 속으로 '제발 맞다고 해줄래. 아니면 대답을 회피해줘'라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들으면 안될 말을 들었다.

밥먹듯이 거짓말 했으면서. 이번엔 사실을 말했다.

비혼주의자라면서.



그제서야 내가 널 좋아했음에도 왜이리 빙빙 돌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을 잘 홀리는 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여자가 좋아할지도 잘 알던 너. 여자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들에 관해서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너.

애초에 여자라는 생물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겠지. 집에 여자가 둘이나 있는데.


안그래도 뻥 뚫려있던 가슴이 이번엔 몸이 횡단면으로 잘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진 못했다. 그게 맞는 거니까. 우린 그 어떤 사이도 아니고 그냥 서로 연락이 끊긴다면 그대로 멀어질 사이였으니까. 내게 남은 충격과 상처는 온전히 내가 자초한, 나만의 것이었다.



그의 가정이 화목하지가 않다는 말을 했을 땐 '당연히 그러니까 니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엔 마음이 쓰였다.


힘들었으면 나한테라도 털어놓고 기대지. 넌 정말 괜찮은 걸까. 너도 속이 말이 아니겠지. 너희 집 사정이 우리집 꼬라지랑 별반 다를게 없으려나.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헤어지지도 못하고 계속 사는 기분을 너도 알려나. 네 아이도 외로운 사람으로 자랄까.

아냐, 이 나쁜 자식아, 넌 동정받을 가치도 없어. 넌 내 감정상태도 알고 있었고 결국 이렇게 아파하게 될 줄도 알고 있었을거 아냐. 게다가 치사하게 가정을 없애버리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게 사람이냐? 이 무책임한 자식아.

오만가지 생각이 내 뇌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친모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지, 내가 상의를 한다고 도와주고 싶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 개자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띠도 개띠인 것을 보면 분명 나랑 사주가 상극이다. 개자식.


왜 비혼주의자라고 숨기고 만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전에 충격이 너무도 컸기에 묻진 못했다.

애초에 잘못된 관계.

그가 이것을 숨기지만 않았다면 나는 이전에 서로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내가 지금처럼 아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 짓은 엄연히 위법 행위(간통죄 폐지되서 아닐 수도 있지만)였으며, 애초에 있지도 않은 신뢰를 없애버린 행위였다.

그러니까 내 상태는 꼭 채식주의자인 내게 몰래 육류를 다져넣곤 비건이라고 속여서 먹인 느낌이었다.



10.

그에게 썼던 모든 마음들을 접었다.

어디가서 쉬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의 고민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바닥을 도려내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홀로 아프게 슬프게 모든 감정들을 떼어내서 파묻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나는 교통사고가 난 것 처럼 아팠다.

그 당시에는 차에 치여도 아프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통증이 극심하게 몰려오는 것 처럼.

이상했다. 전남자친구와 헤어질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낙태를 하는게 출산한것과 다름없다는데. 혹시 비슷한 맥락인걸까.


알고는 있다.

그는 날 마음에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관계가 끝나도 그는 다른 여자를 또 끊임없이 만날 것이다.



가정에서 유래된 결핍으로 남자보는 눈이 이토록 없어서 파트너를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립되는 것 밖엔 없었다. 지금까지 나를 살렸던 것은 모두 있지도 않은 결핍의 사랑들이었다. 예전에도. 이번에도.


0.

끝.

더 이상 글을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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