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앙' 셰프의 시선에서 바라보다.
팥에 설탕을 넣고 나서는 2시간 동안 기다린다. 팥이 당과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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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단팥 인생 이야기] 서울국제음식영화제 개막작 (가와세 나오미 감독 あん, An, 2015)
감독 - 가와세 나오미
작은 도라야키 가게에서 피어나는 잔잔한 이야기. 영화 '앙'은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우리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도쿠에 할머니가 팥소를 만드는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팥과 대화하듯 정성스레 저어 가는 그녀의 손길에는 삶에 대한 경외가 담겨있다. 단순한 음식 만들기를 넘어,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자 철학이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이처럼 정성을 다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든 빛나는 가치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도쿠에의 삶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한센병(나병) 환자라는 이유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갔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도쿠에와 센타로, 그리고 와카나. 서로 다른 세대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도쿠에의 지혜는 센타로에게 삶의 의미를, 와카나에게는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세대 간의 진정한 소통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도라야키라는 음식의 역할이다. 도쿠에의 팥소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녀의 철학과 사랑이 담긴 매개체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음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조용히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과거의 상처나 현재의 한계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고. 도쿠에가 보여준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까?
'앙'은 작은 도라야키 가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정성과 배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만나 빚어내는 인생의 맛.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셰프의 시선으로 들어가 보자.
도쿠에 할머니가 팥소, 앙을 만드는 모습을 묘사해 본다.
밤새 불려 색이 배어 나온 팥을 한 번 삶은 뒤 체에 걸러 찬물로 헹군다. 제대로 씻지 않으면 떫은맛이 난다.
물에 불린 팥을 김이 나올 때까지 끓여 뜸을 들인다.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지만 밭에서 힘들게 와준 팥들을 극진히 모신다.
연자줏빛으로 익은 팥들을 으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에 씻어낸다. 떫은 물을 흘려보내는 일도 천천히 흐르는 물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당과 친해진 팥이 또 한소끔 끓기 시작하면 이제부터는 불을 조절해 가며 뭉근히 달이는 느낌으로 주걱을 꼿꼿이 세우고 저어야 한다. 이렇게 탄생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소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동銅 기구를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최고의 요리를 꿈꾸는 셰프들은 잘 알고 있다. 동의 열 전도율(heat conductivity) 때문이다. 동의 열 전도율은 398W/(m⋅K)로 알루미늄 237, 스테인리스 17에 비교하면 대단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열 전도율은 요리를 위한 열이 조리기구의 전체 표면에 균일하고 빠르게 퍼지게 함으로써 신선한 식재료의 맛과 영양가를 변함없이 유지시키며 음식이 냄비 바닥에 달라붙거나 타지 않게 요리를 할 수 있게 한다. 약한 불에서 요리하므로 에너지가 절약되며 박테리아(세균) 번식을 차단해 준다.
셰프들이 그레이비, 커스터드 소스, 과일잼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를 위해 동냄비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앙'에서 도쿠에 할머니가 팥소를 만들기 위해 불 위에서 2시간 동안 정성스럽게 끓이는 장면은 마치 이런 셰프들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서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사용하는 도구, 즉 냄비와 도구의 디테일에 집중된다. 그녀의 손길과 도구의 조화는 단순히 요리를 넘어선 삶의 정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성을 다해 천천히 끓여내는 팥소의 과정,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시대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든 것을 더 빨리, 더 간편하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도쿠에 할머니가 보여준 팥소 만들기의 철학은 시간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깊은 맛과 가치를 일깨워준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느림의 미학이 아닐까?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정성을 들이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따뜻함을 되찾아야 할 때다. 도쿠에 할머니의 도구와 손길이 그러했듯, 우리도 삶의 작은 부분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