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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Sep 29. 2023

우리는 어쩌다 부르고뉴에 살게 되었을까

프랑스 부르고뉴의 이방인 가족

딸의 어린이집에서 만난 이방인들


 첫째 아이 어린이집에서 학부모들과의 다과회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부르고뉴로 이사오고 일년 반 정도 되었던 시점입니다. 그간 꾸준히 이웃들과 교류가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지역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를 따스히 반겨줄까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다과회로 향했습니다.


  어린이집에 도착하자 스무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앞뜰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딸이 저를데리고 다니며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딸을 알아본 학부모들이 인사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어느 학교로 가게 되었나, 어디에 사나, 무슨 일을 하나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저는 그간 몰랐던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학부모들 중 저희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다 부르고뉴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저희만 지역민들 사이에 낀 이방인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고군분투해갈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펜데믹 이후의 세계,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떠나는 사람들?


  팬데믹을 계기로 프랑스에서도 원격근무가 일반화되었습니다. 펜데믹 초반에는 원격 근무가 일상을 완전히 바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번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게 될 것이란 예측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국토 자원청 에서 이번년도 초 삼년 간의 데이터를 종합해 실제로 펜데믹이 프랑스인의 거주 환경을 바꾸었는지 조사했습니다. < 링크 : Exode urbain, mythe ou réalité ? (도시 탈출, 그것은 신화 혹은 진실?)> 


  예상과는 달리 도시에서 시골로 떠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시골 인구 비율 1퍼센트 올랐으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의 숫자는 펜데믹 동안 확실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부분 살던 도시와 가까운 외곽으로 가거나 살던 곳과 비슷한 규모의 지역으로 이사를갔습니다. 펜데믹이 라이프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았지만 새 거주지를 찾아 떠날 동기부여가 된 것은 맞다는 뜻입니다.



예상과 달리 시골 인구는 펜데믹 이후 1%만이 늘었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떠나는 인구는 유의미하게 늘고 있다


프랑스 제 2의 도시 리옹을 떠나 부르고뉴로 오게 된 이유


 저희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온 예외적인 1퍼센트 중 하나이지만 펜데믹으로 이사를 결심한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프랑스의 제 2 도시인 리옹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리옹의 벼룩 시장 퓨스 드 카날(Puces du canal 링크) 에 프랑스 앤틱 가구를 사고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링크


 가구를 취급하려면 창고 공간이 따로 필요했기에 도시 외곽에 공간을 대여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도 월세였고 가게도 월세, 창고도 월세였습니다. 총 세 종류의 월세 지출이 있었던 것입니다.



Puces du canal에 있던 가게의 사진


펜데믹 후 프랑스 앤틱 시장에 찾아온 변화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일주일 후 첫 번째 격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기 모두가 그랬듯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 여러 추측을 하며 세 가족이 집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번째 격리가 끝나고 남편은 가게로 평소 대로 출근을 했습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 이웃 상인들과 모여 앉아 서로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거래를 주고 받았던 업자들의 전화였습니다. 직접 시장으로 오기 쉽지 않으니 사진으로 물건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일이 우려했던 것 만큼은 끊기지 않았고 이전보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이어갔습니다.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격리가 3차까지 이어지고 우리는 그 삶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럴꺼면 우리가 리옹에 가게가 있을 필요가 있는 걸까 하고요.


 리옹에 가게가 없다면 리옹에 살 이유도 없습니다. 굳이 세 종류의 월세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도시와 멀어도 시골에 창고가 딸린 집을 구입해 지출을 하나로 합쳐보면 어떨까. 그것이 이사를 결심한 계기였습니다.



이사를 결심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새집보다는 수리가 필요한 고택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옛집을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예산이었습니다. 창고가 있을만큼 부지가 큰데 리모델링이 된 집은 현실적으로 구하기 힘들 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시댁에서 옛 농가를 사서 현대식으로 수리를 했기 때문에 집을 고치는 것은 남편이 자신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일단 믿고 당장 살 수 없을 만큼 노후한 집도 범위 안에 넣었습니다. 지붕과 벽만있다면 간이 시설을 설치하든 어떻게든 살 방법은 있으니까요. 그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품에는 태어난 아이가 있고 우리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으며 아직은 젊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우리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니 더 늦기 전에 저금리 혜택을 보려고 모두가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사고 집이 있는 사람은 별장을 샀습니다.


  저희가 시골에 집을 찾기 시작했을 때는 팬데믹 이년 차로 가격이 오른 것은 둘째고 아예 시장에 매물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대도시 외곽 지역은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희는 지역의 범위를 점점 늘려갔습니다. 처음에는 리옹에서 차로 삼십분, 한 시간, 한 시간 십분, 그리고 십분 더. 그러다 결국 부르고뉴 남부까지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르고뉴와의 첫 만남, 그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행운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이 집을 부동산 사이트에서 찾았을 때 저희는 이미 지쳐있었습니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서 젊은 부부는 신경도 안쓰는 부동산 업자를 만나 수다나 떨고 오겠지 생각했습니다. 가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리옹에서 한참을 달려 부르고뉴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집은 지금까지 다녔던 집에 비하면 멀끔했습니다. 당장 들어가 살아도 되는 집다운 집이었습니다. 집 뒷창고에는 임대인이 소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소들이 사는 곳이라 가축 냄새가 가득하긴 했지만 저희가 원하는 이상적인 크기였습니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집 주인 할머니의 따님이었습니다. 본인이 쓴 광고글을 보고 우리가 연락을 한 거라 직접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집 앞에 붙어있는 부동산 중개소 간판은 두 개였습니다. 부동산에 의뢰를 했음에도 지금 같은 시기에 집이 안 팔린 거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집 주인 아주머니는 이 집에서 백 년 동안 한 가족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닭장을 보여주며 옛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따님께서는 덧붙여 설명해주었습니다. 본인이 집을 고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집을 이어갈 상황이 안된다고요. 진작에 팔렸어야 하는 집이지만 임대인과 법적 분쟁로 지금까지 미뤄진 것이라고요.


  남편과 제가 집 앞에 서서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살이던 딸이 바둥거리며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바닥에 내리자마자 손살 같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짧은 다리로 얼마나 빠르게 뛰어들어가던지 제가 뒤꽁무니를 쫒는 꼴이 되었습니다.

  딸은 거실로 들어가 방에서 방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붙잡으면 뿌리치고 다시 앞으로 달렸습니다. 뛰는 내내 딸은 크게 웃었고 빈 집에 웃음소리가 가득찼습니다. 집 안 달리기를 끝낸 딸은 곧바로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들판에 앉아 민들레 꽃을 따며 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웃스개소리로 말합니다. 그날 집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딸이었다고요. 어리 숙한 젊은 어른이었던 엄마 아빠가 눈 앞에 찾아온 행운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어린 아이는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 집이 내가 자라고 싶은 집이라고요.


  두 번의 재방문 후 계약 의사를 밝혔을 때 집을 소개해주신 따님께서 말했습니다. 집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고 그분들이 조금 높은 가격에 먼저 구매를 원하셨다고요. 저희에게 이 집을 넘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족의 추억이 담긴 집에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가 살아주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현실의 우연이 만들어낸 동화


  그렇게 저희는 부르고뉴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르고뉴가 좋아서 찾아 들어왔다기 보다는 어쩌다보니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셨는데 조금 실망하셨을까요. 때로는 현실의 우연이 동화 같은 결과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아름다운 지역에 어쩌다 흘러오게 된 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이지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외진 프랑스 시골에서 사는 한인은 많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 물어볼 곳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이삿짐을 싸면서 막연함에 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느날 밤에 방에 들어와서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요. 매듭을 묶은 사람이 푼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에 오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말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릅니다. 어찌됐든 선택은 내려졌고 제가 내린 결정은 수습해야 합니다. 불안해할 시간에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습니다.


  이사 오자마자 곰팡이 난 벽지를 뜯어내고 바닥을 긁고 창고에 가득한 오물을 치웠습니다. 집이 사람이 살만큼 멀끔해지자마자 둘째가 찾아왔고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이전만큼은 아니나 남편의 일도 계속 도왔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지만 이 정도면 잘 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쩌다 살게 된 부르고뉴지만 이곳에서 우리 가정을 잘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첫 단추가 어떤 식으로 끼워졌던 간에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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