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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dame Snoopy Jun 16. 2019

이유가 없어도 여행은 가야 합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리뷰

오래전부터 인기 있던 김영하 작가를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처음 보았다. 그리고 '저렇게 아는 것 많고 재미있는 작가의 책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나만 빼고 대부분 다 읽었을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단편으로 시작했는데 예능과는 달리 진지한 작품들이라 반전 매력을 느끼며 읽고 있다.


며칠 전부터는 팟캐스트도 추천받아 듣고 있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작품을 소개하고 읽어준다. TV와는 정 반대의 캐릭터 같지만 책을 읽는 데는 오히려 잘 맞는 분위기라 생각한다.



그의 신간 에세이 <여행의 이유>가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 배송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바로 그의 여행 에세이에 빠져들 수 있었다.




모든 경험은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의 첫 번째 챕터인 '추방과 멀미'는 약간은 어이없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편도 항공권을 구입하는데 그 이유가 조금 당황스럽다. 중국에서 한 달간 장기여행을 하기 위해 도착했으나 가장 기본적인 비자를 준비하지 않아 공항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것도 가지고 있는 왕복 항공권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새로 비싼 편도를 끊어서.


나로서는 처음 읽는 부분이 이런 내용이라 한 대 맞은 기분으로 읽고 있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흔치는 않겠지만, 겪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의외로 최악의 기분은 아니었다...(중략) 난생처음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나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P16

그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경험조차 소설가로서 집필 재료로 생각한다. '뼛속까지 작가구나'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나 같으면 가족 외에는 그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부끄러워서 두고두고 자책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는 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누군가 중국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혼자서 속으로 그때 일을 곱씹을 텐데. 그리고 그걸 대놓고 책에 쓸 생각은 못했을 것 같다. 역시 소설가다.


어떤 경험이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다


중국이 '중공'으로 불리던 시절, 운동권 학생에게 주어진 중국 여행 이야기도 편안하게 썼지만 생각해보면 심각한 여행이었다. 여권 발급부터 출국 전 교육, 예절교육 등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안기부 직원과 형사까지 동행한 여행인데 자유로웠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여행이 어쩌면 그의 운명을 살짝 틀어주었고 작가 김영하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었을 거라는 얘기엔 함께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같은 책, P57


그는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중국 비자 사건과, 대학생 시절 다녀온 중공 여행을 합쳐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여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본 어떤 리뷰에서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느낌'으로 쉽게 쓴 책이라고 평하기도 했던데, 그러면 뭐 어떤가. 쉽게 써도 이런 경험을 엮어 이 정도의 이야기를 만든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에도 실패한 여행이 있을까


책 제목은 <여행의 이유>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지금까지 내가 다녀온 여행을 돌아보게 된다. 내 여행은 성공했을까, 아니면 실패한 여행이었을까.


마침 지난주 <대화의 희열 2>에 김영하 작가가 출연해 그의 여행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실패한 여행이란 '기억이 안 나는 여행'이라고... 보통 여행이 실패했다고 하면 기대와는 다른 여행지의 모습이나, 여행하기 어려운 궂은 날씨,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 연착된 교통수단 때문에 일정이 꼬이는 등 스케줄대로 하지 못한 여행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매끄러워서 기억에 남지 않는 여행이 실패한 것이라 말한다. 쓸 것이 없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시간낭비나 다름없다고...


실패하면 글로 쓰면 된다


실패한 듯 보이는 여행이야말로 긴 인생의 관점에서는 성공한 여행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니. 여행에서 뭔가를 얻어와야만 하고,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미리 준비한 일정에서 어긋나면 안 된다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깨 주었다.



여행은, 그냥 떠나는 것


여행( 旅行)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표준국어대사전)

예전에는 여행을 떠나면 더 많이 보고, 많은 일정을 소화해야 뿌듯했다. '꼭 봐야 하는 장소'. '꼭 먹어야 하는 음식' 등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그건 실패한 여행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웅장하고 화려한 곳이 아니었다. 비 오는 공원에서 마주쳤던 청둥오리, 길을 헤매다 카페에서 마신 시원한 아메리카노, 마트에서 발견한 현지에만 있는 과자 등 소박한 경험이 기억에 남았다. 랜드마크라는 곳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만큼 멋졌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로만 채우지 않아도 여행은 좋다.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꼭 김영하 작가처럼 쓰지 않아도 좋다. 그는 이미 완벽한 작가이며, 글로 밥 먹고 사는 프로페셔널이니까.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자기 방식대로 기록한다면 그 자체가 여행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일단 떠나고, 돌아오면 된다.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면 분명 '이유 있는 여행'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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