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 안에서 기승전결을 내는 것도 좋아하지만 여러 개의 단편소설이 모여서 장편소설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한 편 한 편 읽어나갈 때마다 작품의 성장을 함께하는 느낌이랄까.
만화 「맛의 달인」이 그런 작품이었다. 각각의 회차마다 주인공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걸 응원하다 보면, 어느새 주인공 개인의 삶도 차근차근 변화한다. 음식에 대한 실력은 뛰어나지만 아버지를 오해하고 결혼 생각이라고는 없었던 주인공 지로가 경험은 부족하지만 뛰어난 감각으로 함께 미션을 수행하며 가까워진 유우코와 결국 결혼하고 성장하는 모습은 내가 이들의 친구인 것처럼 흐뭇했다.
이렇게 시리즈로 이어지는 작품을 읽다 보면 주인공과도 제법 친해진다. 얼굴은 모르지만 절친인 듯 그들의 성격과 습성을 잘 알게 되고,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풀어 나갈지 기대하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이하 미미 여사)의 작품은 대부분 좋아하지만,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야베 월드 2막>을 특히 더 즐겨 읽는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시대물인 만큼 인명과 지명, 관직 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전권을 섭렵하고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지금은 대강이나마 윤곽이 들어온다. 그야말로 '에도시대를 소설로 배웠어요'다.
미미 여사의 에도물에 대해서는 지난번 작품인 「삼귀」 리뷰를 하면서 다룬 바 있다.
「삼귀」도, 오늘 얘기할 「금빛 눈의 고양이」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에 속한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자라온 친구가 약혼자를 죽이고 자살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은 주인공이 괴담을 들으며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이다.
「흑백」, 「안주」, 「피리술사」, 「삼귀」, 그리고 최신간인 「금빛 눈의 고양이」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 이야기인 「흑백」 이후로 무려 20개 이상의 괴담을 듣고, 그 사이에 주인공 오치카의 주변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물론 에피소드 각각에도 감동과 재미가 있지만 그걸 통해 주인공 오치카가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뿌듯하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그녀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했던 것 같다.
사실 미시마야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서 오치카의 감정에 완전히 동화되기는 쉽지 않았었다. 드라마나 영화도 시점을 맞춰 봐야 좀 더 공감이 쉬운 것처럼, 시리즈도 그런 것 같다.
지난 편인 「삼귀」에서는 괴담 사연 하나하나는 정말 재미있고 절절했지만 주인공의 상황이 갑갑했다. 고향을 떠나 상처도 조금은 아물고 마음이 가는 사람도 생겼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로 헤어지게 됐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긴 했으나 이 사람과 뭔가 진전이 되려면 주인공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큰 결단이 있어야 할 것 같다며 꽤 투덜대며 책을 덮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트라우마의 유효기간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걸로 타인에게 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미미 여사가 밝힌 대로 주인공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늙어가리라 기대해볼 뿐.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소설 주인공에게 '당했다!'란 생각이 드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음전하고 모범생 같은 타입이 예상치 못한 말을 쓸 때, 훅 들어올 때 의외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그간 '답답하다', '과거에 너무 묶여 사는 것 아니냐'는 느낌이던 오치카에게 한방 먹었다. 그리고...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는 말 밖에.
지난번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한 세책 가게 효탄코도의 후계자 간이치는 함께 이야기의 의문을 풀어나가다, 스스로 괴담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오치카는 마음을 결정하고 직접 프러포즈를 하러 효탄코도에 방문한다. 하, 이렇게 재빠른 전개라니.
큰 결단 정도가 아니다. 직구 중의 직구를 날리는 데다 이제 괴담을 듣는 역할은 사촌오빠인 도미치로에게 넘기게 되는 것 같다.
작품 속에서는 3년이지만, 소설 발행 시점으로 치면 7년간 이어온 그녀의 괴담 듣기가 마무리됐다. 늦게 이 작품을 집어 든 탓에 나도 3년 만에 주인공의 성장에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른 이의 연애담이다. 비극적인 일을 겪었지만 내게 3년간 때로는 갑갑하고, 때로는 흥미진진한 연애담을 들려준 주인공 오치카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