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처럼 맛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
지갑을 열게 만드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오늘이 마지막', '이 제품이 마지막' 등 무한정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도 제법 큰 효력을 가진다. 난 그중에서도 '계절 한정'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그때만 먹을 수 있다는 말도 되지만, 제철이라 맛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중, 계절 한정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품목은 역시 '가을 한정 밤' 제품이 아닐까 한다.
밤에는 칼슘, 비타민(A·B·C) 등이 풍부하다고 한다. 성인병 예방과 신장 보호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밤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밤을 사용한 제품을 보면 일단 사 보게 된다. 비록 겉모습이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은 제품이더라도. 이 정도 되면 그냥 내가 태어날 때부터 '밤을 좋아하는 유전자' 같은 게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나만큼 일단 밤 제품이라면 먹고 보는 사람도 그렇겠지?
밤 제철은 9월부터 12월. 그야말로 '이 밤의 끝을 잡고' 밤 얘기를 시작해본다.
밤이 맛있는 건, 벌레도 안다
마트에서 속껍질까지 다 벗겨진 밤을 구입하지 않는 한, 통밤을 사서 깔 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밤벌레다.
특히 약을 거의 치지 않을수록, 밤의 당도가 높을수록 많이 만나게 된다. 미리 밤을 삶은 경우 산 채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맛있는 밤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무농약으로 키운 밤이 좋긴 하지만 벌레 때문에 난처해지는데... 그래, 벌레도 맛있는 건 알겠지.
부드러운 식빵 속에 숨어있는 달콤함, 밤 식빵
계절 한정이 아니라 고마운 밤 제품이 있다. 바로 밤 식빵이다. 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지 프랜차이즈 빵집부터 식빵 전문점까지 대부분 다 갖춰놓았다.
일반적인 밤식빵은, 윗부분에 달콤한 크럼블과 견과류(주로 아몬드)를 얹고 식빵 속에는 밤 통조림을 넣었다. 어떤 곳에서는 통조림 밤이지만 넉넉하게 넣어서 그나마 먹을 만 한데, 밤도 적게 넣고 빵도 퍽퍽한 제품은 정말 최악이다. 그래도 어딜 가나 밤 식빵이 있으면 일단 구입해보는 건... 이것도 병일까?
파리***, 뚜레** 등의 점포에서는 보통 밤 통조림을 이용한 밤 식빵을 내놓고 있다. 지점별로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날 나온 밤식빵이라면 먹을만하다. 밤 식빵으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도 꽤 별미다. 계란물에 설탕을 적게 넣고, 버터를 넣어 구워내면 밤의 달콤한 맛이 배가된다.
프랜차이즈지만, 꽤 실한 밤식빵을 파는 곳도 있다. 그중 하나가 아티제다.
일반 식빵보다 크기는 작지만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하지만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안에 커다란 통밤 조림이 들었기 때문이다. 빵은 부드럽고 촉촉해서 동네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밤식빵 치고는 정말 만족스러운 제품이다.
난 이 빵에 본마망의 밤 페이스트를 발라먹기도 하는데, 정말 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조합이다. 살짝 달긴 하다.
여담이지만, 저 밤 페이스트를 우유에 타 먹으면 밤 우유가 된다. 이 역시 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음료다.
밤이라면, 역시 몽블랑이지 1 - 카페 imi
몽블랑은 밤을 이용한 유명한 디저트다. 보통 크림 위에 국수 모양으로 나오는 깍지를 이용해 밤 퓌레를 짜내서 산 모양을 만든다. 속은 파티시에의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올해 먹어본 것 중 인상적인 두 가지 제품을 소개한다.
홍대에 위치한 <카페 imi>의 밤 몽블랑이다. 이곳에서는 계절별로 다른 재료를 사용한 몽블랑을 판매하고 있다. 몽블랑이라는 이름에 충실하게(만년설이 있는 Mon Blanc 산) 산 모양으로 밤 퓌레를 짜 내고 맨 위는 생크림으로 장식했다.
이 제품의 진짜 매력은 전혀 달지 않은, 직접 만든 게 분명한 밤 퓌레다. 보통 몽블랑의 밤 퓌레 국수(?)는 달디단 게 특징인데, 밤 페이스트 캔을 사용하는 가게가 많다. 하지만 이 집은 속의 통밤 조림도 그렇고, 밤 퓌레가 달지 않아 생크림과도 밸런스가 잘 맞는다. '순수한 몽블랑' 이라고나 할까. 바닥은 파트 쉬크레 속에 밤이 들어간 아몬드크림층이 있어서 역시 전체적인 맛의 조화가 훌륭하다.
밤이라면, 역시 몽블랑이지 2 - 오카시야
올해 발견한 가게 중 큰 수확은 역시 여의도의 오카시야다. 우연히 찾아가 당근케이크와 감자케이크를 맛봤는데 정말 내 취향이었다. 역시 이 가게에서도 가을 한정 몽블랑을 내놨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몽블랑 바닥이 패스츄리라는 것. 반으로 자르기에는 약간 힘이 필요하지만, 바삭바삭한 파이지에서 가을 맛이 난다.
파이지 위에 제누와즈 시트를 깔고, 또 생크림과 밤 조림을 얹은 후 정성스럽게 밤 퓌레를 짜서 올렸다. 맨 위에는 금박으로 장식한 커다란 밤 조림이 있다. 외관부터가 꽤 고급스러운데 한 입 베어 물면 리큐르 향이 진하게 풍겨 어른이 좋아할 맛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알코올이 다 날아가지 않은 듯해 아이들이 먹기에는 무리일 듯하다. 하지만 진한 홍차와 먹으니 가을, 그것도 늦가을 느낌이 나는 매력적인 디저트다.
촉촉한 파운드케이크의 필수품, 밤
아티제에서 매번 밤 식빵만 먹었는데, 파운드케이크 코너에 이런 제품이 있었다. 바로 밤 파운드!
촉촉한 갈색 파운드케이크 안에 통밤 조림이 들었다. 파운드케이크도 촉촉해야 맘에 드는 내게 딱 맞는 맛이었다. 밤 식빵에 들어간 알밤 조림과 다르게, 훨씬 덜 달면서 케이크 속에 어울리도록 더 부드럽다. 파운드케이크 속에는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가 들어간 걸 좋아했는데, 이 정도라면 가을에 어울리는 파운드케이크로 올려두어도 될 듯하다.
양갱에도 밤은 필수!
밤에 이어 팥도 정말 좋아하는 내게 있어 밤이 들어간 양갱이란 그야말로 완전체에 가까운 디저트다. 곱게 체에 내린 앙금과 한천, 설탕을 섞어 굳힌 팥양갱에 살짝 조린 밤 조림을 넣어 만들면 그 맛은 정말 천국의 맛이다.
연희동에서 만난 생양갱 전문점 <금옥당>의 몇 가지 제품 중 단연 내 마음속 1위를 차지한 제품이다. 촉촉한 수제 양갱이라 더 밤 조림과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밤이 들어가지 않은 양갱도 훌륭하지만, 그래도 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밤 양갱이 최고!
사실 지금까지 수많은 밤 제품을 먹어봤기에, 외관만으로도 '아, 이 제품이 맛이 있겠구나' 또는 '이 제품은 내 취향이 아니겠구나'라는 판단은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을 뒤로하고 그래도 밤 제품이니까, 먹어본 적 없으니까 구입하고야 마는 패턴은... 어찌 보면 바보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재료는 아마 밤 이외에는 사과 정도이다. 왜? 궁금하니까. 이 가게에서는 밤을 가지고 또 어떤 변주를 해 냈을까? 의외로 속은 알차서 맛있을 수도 있잖아? 등의 희망을 가지고 또 먹어보는 것이다.
밤을 사용한 빵과 케이크만 모아놓은 가게가 있다면 정말 황홀할 것 같다. 그게 팝업스토어라도... 가을 한정으로 한번 해 보면 어떨까?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 신나게 밤 제품을 구입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번 밤 시즌을 마친다.
또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