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오리와 생쥐/존클라센 그림, 맥 바넷 글
개인적으로 존 클라센과 맥 바넷의 작품을 좋아한다. 블랙코미디 같이 웃기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어 좋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어려운지 자주 꺼내읽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런 이야기의 매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 이 작가의 책은 대부분 소장하는 편이다.
이 책 역시 맥 바넷 작가의 책인데 보통의 맹수가 나오는 이야기라면 "잡아 먹힐 뻔 했지만, 도망쳤다"거나 "잡아먹혔지만, 누군가 구해줬다"의 구성을 가지는 반면에 이 책은 "잡아 먹혔대"에서 시작하는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책 이야기]
어느 날 생쥐 한 마리가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그리고 생쥐는 늑대 뱃속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는 오리를 만난다. 그리고 이 곳은 늑대에게 잡아먹힐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쥐는 오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다 오리와 생쥐의 축제로 배앓이를 시작한 늑대가 사냥꾼에 잡힐 위기에 처하고, 생쥐와 오리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늑대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운다. 늑대는 오리와 생쥐에게 사과하고 생쥐와 오리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한다.
"늑대가 날 삼켰을지는 몰라도 난 잡아먹힐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거든"
시련을 만났을 때
이 문장이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삼킴 당했어도 먹히진 않겠다는 의지.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담대함이 담긴 문장. 아무리 멘탈을 부여잡고 살아도, 살다보면 나를 무너뜨리는 다양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난 예기치 않은 시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곤 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왜 하필 나야?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인가?” 한 동안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했다. 우습게보이기 싫어서 입사 후 처음으로 염색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수치심과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두자', '때려치자'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씩 생각했지만 매월 따박따박 입금되는 월급을 끊어낼 용기는 내게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가볍게 느껴져 난 점점 더 무너져가고 무기력해졌다. 그때 책 속의 이 문장이정신 차리라고 내 뺨을 후려치는 듯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죽음은 잡아먹힐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때 찾아오는 거구나.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나의 가치를 지키며 살기로 했다. 이미 한 번은 잡아먹혔으니 이제부턴 "누군가 원하는 나"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보자고. 눈치보면서, 다른 사람이 하라는대로만 했던 수동적인 태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떳떳이 요구하고, 원치 않은 것은 당당하게 거절하는 좀 더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갖기로.
그건 우습게 보이기 싫어 외모를 바꾸거나 무책임하게 퇴사하고 도망치는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 안에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걸"
시련 속에서 살아가기
오리는 늑대의 뱃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것,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늑대의 뱃속은 어둡고 더럽고 냄새나지만, 밖과 달리 잡아먹힐 염려가 없다는 것과 늑대를 이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오리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이미 상처 받은 곳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나쁘게만 보였다. 무책임한 팀장은 미치도록 미웠고, 공감하지 못하는 동기들은 섭섭했다. 힘 없는 리더십은 답답했고, 납득되지 않는 조직문화는 한심하고 화가났다. 몇 차례 모진 바람이 지나가고 나니 가을 낙엽 떨어지 듯, 마지막 잎새 하나 남지 않고 온갖 정이 우수수 떨어져버렸다. 그런 회사를 다니는 것은 매일 지옥으로 출퇴근 하는 기분이었고 당장 이 답답하고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피해의식에 속에서 공황이 찾아 올 때 쯤. 순간, 한 발 물러서 직장을 바라보게 됐다. 회사라는 건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NGO 직원 특성상 가지게될 수 밖에 없는 사명감, "업(業) = 나"라는 지나친 의미부여가 오히려 나를 더 혼란에 빠뜨리고 그만큼 더 실망하게 했던 것이다. 직장에서 부당함을 당했다고 전 존재가 부정당한 것 처럼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답답한 현실일지라도 그 속에서 어떻게 살지는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사회복지 업무를 하며 느끼게된 것은 생계가 어렵다고 모두가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같은 조건에서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사람이더라도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는 사람의 모습과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의 태도와 모습은 분명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늑대의 뱃속에서 죽을 지, 살 지는 나의 태도가 좌우하는 것이었다.
"돌격"
시련은 나의 힘
재미있는 건, 오리와 생쥐는 자신을 잡아먹은 늑대에게 복수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엔 오리와 생쥐가 늑대를 속여 파티를 열고, 늑대가 배앓이를 하는 장면이 통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곧 그것 때문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들의 안식처인 늑대를 위협하는 사냥꾼과 싸우며, 상대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늑대의 히어로가 되어 승리를 쟁취한다. 그 결과 오리와 생쥐는 늑대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공생한다. 일곱 마리 아기염소나 빨간모자처럼 사냥꾼의 도움으로 늑대의 뱃속에서 탈출해 복수하는 방법보다 능동적이면서 힘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오리와 생쥐는 삼킴 당했지만, 잡아먹히지 않았다. 시련을 당했으나 불행해지지 않았다. 시련에서 살아 남았고 그 덕분에 사냥꾼에 맞설 용기가 생겼으며, 안전한 공간을 얻었다.
살아가면서 닥치는 시련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으며, 싸운다고 싸워지지 않는다. 시련을 극복한다는 건 시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견디어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시련에 대항할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시련에 먹히지 않고 시련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게 될지도.
To. 차니주니
살면서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을 거야. 억울한 일도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고, 기가 막혀 화가 나는 일도 많지. 어려운 일을 피한다고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려움에 맞서 싸운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어. 하지만 분명한 건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야. 어려움 속에 빠졌을 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고, 어려움이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줄 수도 있어. 그러니 찾아 올 어려움으로 인해 미리 염려할 필요도 없고, 찾아온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할 필요도 없어. 너의 삶에 찾아 올 모든 어려움을 너의 편으로 만들어 행복하게 살아가렴.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빌 4: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