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이름 붙이는 일

말 못하는 슬픔

by 소소한 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엄마 손을 잡고 한 달에 한 번쯤이었을까 병원에 함께 따라간 기억이 난다.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병원 앞 청량리역에서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서 파는 옥수수빵을 먹는다는 생각에 병원을 가는 날이면 “엄마 오늘 옥수수빵 먹는 날이야?”라고 묻곤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자신이 어떤 약을 먹는지 주변 사람은 물론, 어린 내게 줄곧 숨겨왔다. 매일 밤 무슨 약을 먹지만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자랐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헌신적이었다. 문학, 역사, 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의 전집들을 떡하니 사주고, 지역에 좋다는 학원에 등록시키고, 다른 엄마들과 같이 학원 교실 밖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학급 임원의 부모로 반 아이들에게 열심히 롯데리아 햄버거를 돌렸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한움쿰의 알약을 삼켰다.


아파트 5층에서 집에 있는 접시를 모조리 집어던진 일, 사람들이 다 나와서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고, 8살이었던 나는 놀라 잠옷 바람으로 공중전화로 달려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 같은 반 친구가 너희 엄마 보라며 놀렸던 일. 이외에 아빠와 자주 싸우고 나를 손으로 수차례 때렸던 일 등을 종종 겪었지만 어린 내게 엄마는 그저 남들보다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 사소한 것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나를 너무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내가 학교에만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엄마는 늘 외로워했다. 게다가 엄마는 나가서 사람들과 싸워서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관계는 점점 끊겼고 의기소침해졌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면서 아빠와 내가 오기만 기다렸다. 혼자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외출하기 위해 신발을 신을 때 느껴지는 시선이 괴로웠고 나가서는 언제 들어오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와중에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집으로 왔고, 혼자 약을 타러 못 가겠다는 말에 수업을 빠지고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내가 아파서 못 나온 줄 알고 괜찮냐고 물어대는 친구들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의 증상은 날로 심해졌다. 물을 갖다 달라고 해서 가져다주면 이렇게 무거운 컵을 가져다주면 어떻게 먹으라는 거냐며 물이 담긴 컵을 집어 던지며 새로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지발가락 밑바닥에 압정이 밟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는 엄마가 온갖 손에 잡히는 것을 가위로 오려놓고 압정까지 바닥에 흩뜨려 놓았다.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탓에 하루에 네다섯 개의 택배가 도착했다. 대출금과 카드빚은 천만 원대였다. 매일 밤 아빠와 시비와 붙었고 경찰이 집에 찾아 왔고, 엄마는 집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엄마의 분노를 진정시키며 엄마가 집어던진 물건을 정리하고 부서진 물건에 깨어진 유리 조각을 쓸어 담아 버렸다. 별일 없이 잠드는 날에는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려야 했다.


중간고사 전날은 공부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인생 교육을 해주겠다며 공부하고 있는 책상을 엎었다. 내신으로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나는 다음날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다. 이제는 엄마가 학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담임선생님이 집에 찾아 왔다. 평소 엄마는 나를 때리다가도 미안하다며, 사랑한다고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집을 나와 새벽에 문이 열려있는 동네 한 교회의 예배당에서 쪽잠을 자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엄마는 남자들에 의해 끌려갔다. 커다란 구급차가 집 앞에 와 있었고 웅성웅성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엄마가 발악하는 모습을. 영화 속 이야기로만 들었던 병원에 엄마가 갇혔다.


엄마가 없는 사이 엄마 핸드폰으로 오는 카드회사의 독촉 전화를 받았고, 그 사이 수능을 봐서 시간이 많아진 나는 집을 정리했다. 빨간 립스틱으로 우리의 욕이 도배돼있는 내 방 벽지에 물감을 덧발라 그림을 그렸다. 대학에 입학 전엔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도 했다.


퇴원한 엄마는 늘 항상 아팠다. 머리가 깨질듯한 심한 두통부터 두근거리는 심장과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 온몸에 느껴지는 근육통, 어깨와 척추뼈 통증으로 뇌 MRI, 심혈관 조영술, 자가면역질환, 척추 검사 등 받아보지 않은 검사가 없었다. 고통은 너무 쓰라리고 선명한데 그 고통을 인정받지 못한 엄마는 좌절했다. 그런 세월이 계속되자 나중에 엄마는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이름을 부여했다. 자신은 장애인으로 태어났고 내 몸에는 암 덩어리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그리고 치매까지 시작되었다고. 이유 없이 찾아온 고통은 엄마의 삶을 파괴해나갔고 엄마는 고통에 자신을 서서히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아픈 엄마를 대신해 매일 아침 아빠는 간장계란밥을 비벼주었다. 딸에게 아침밥이라도 먹이려는 아빠의 서툰 노력이었다. 아빠는 지금도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밥을 먹고선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엄마의 희생을 이야기하는 서사가 지긋지긋하고 주 양육자가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의 주장에 환멸이 난다. 모든 이야기를 나누는 가장 친한 친구는 나의 아픈 이야기는 두려워 듣기도 전에 피했다. 내 엄마가 자신 같다던 친구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다며 절교를 선언했다. 나의 상처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픔과 슬픔을 꽁꽁 싸매다 겨우 비어져 나온 이야기에 상처만 더욱 깊어진다. 우리 엄마가 암이었다면 그랬다면 엄마도 나도 떳떳하게 말하고 슬픔을 이해받고 도움을 구했을 텐데, 라는 상상을 오래전부터 수없이 해본다.


엄마는 30년 넘게 약을 먹는다. 약을 먹지 않는 엄마는 상상하지 못한다. 약은 엄마 몸의 일부가, 일상이 되었다. 엄마에게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며 우울의 늪에서 길어 올려주지만 때때로 불안은 엄마를 지배한다. 또 입안은 사막같이 건조했고 기억력은 치매 노인 수준으로 감퇴하는 듯했으며, 위암을 의심할 만큼 위가 자주 쓰라렸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와서도 ‘졸리다’라고 말하는 엄마에게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자지 왜 나왔어’라고 말했다. 자주 사탕이나 물을 찾으며 입 마름을 호소하는 엄마를 보고 나이가 들어서 그러려니 싶었다. 다섯 살 아이처럼 같은 것을 묻고 또 묻는 엄마가 나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엄마의 증세가 다시 심해진다. 이제는 외할머니와 아빠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입원시켜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갔다오면 엄마는 일상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빠와 할머니에게 향한 뿌리깊은 증오가 이제는 나로 옮겨오겠지, 가족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제압당한 엄마의 그 무력감과 절망감, 상처들이 다시 생을 살게끔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아니 가능은 할까. 미성년자라는 울타리 안에 있던 내가 그립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엄마가 끌려갔던 모습을 봤던 시절이 나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끝나지 않는 괴로움과 죄책감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나의 책장은 고통, 아픔, 슬픔, 상처, 죽음이 들어간 제목의 책들로 가득해졌고, 내 인생은 그것과의 싸움이 된 동시에 한몸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언제쯤 엄마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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