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뒤에서 뻗어 온 침묵의 손

3회_ 레 리트 데 자르, 이영의 초대

by 새벽별노리


벽 뒤에서 뻗어 온 침묵의 손



혜진의 물음에 시안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의 메시지 창은 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제 더 이상 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혜진을 덮쳤다. 그녀는 너무 깊이 들어갔을까? 그의 마음의 온도를 묻는 자신의 호기심이 지나쳤던 걸까? 혜진은 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손톱 아래로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처럼 불안감이 뼈를 타고 전해졌다.


그녀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슬픔의 온도는... 과학으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차갑습니다. 모든 것을 얼려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온도죠."


시안의 답장은 혜진의 예상을 뛰어넘는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의 솔직한 고백에 혜진의 마음이 아려왔다. 그는 정말로 모든 감정을 얼려버린 채 살고 있었구나. 혜진은 그의 차가운 온도를 녹여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온도를 견디고 있는 당신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잖아요. 모든 것을 얼릴 수 없는 단 하나, 그게 바로 당신의 마음이 아닐까요?"


혜진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작가로서의 조언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피부에 닿자 왠지 모를 설렘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그날 밤, 시안(이영)은 잠 못 이루고 자신의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혜진의 메시지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얼릴 수 없는 단 하나, 그게 바로 당신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녀의 말은 과학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차갑게 굳어 있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혜진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털어놓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진짜 '이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만약 그녀마저 자신을 떠나버리면?


그는 망설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시계를 보았다. 며칠 뒤면 그는 대규모 강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강연의 주제는 '감정과 뇌과학'. 혜진의 메시지를 떠올리자, 강연 주제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차가운 논리 속에서 그의 뇌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글에 나오는 '색채'와 '공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제가 관여하는 미술 프로젝트가 있는데, 익명의 자문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영은 만남의 핑계를 가장한 논리적인 벽을 다시 세웠다.


혜진은 곧바로 답장했다. "온도요? 아마도... 이제 막 녹기 시작한 얼음 같아요. 투명하지만, 언제든 모양이 변할 수 있는."


시안은 그녀의 시적인 대답에 자신이 설계한 복잡한 회로가 모두 타버린 듯한, 아찔한 공허함과 기묘한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논리로 그녀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7시, 레리트 데 자르(L'elite des Arts) 아트센터입니다. 강연회와 VIP 개막전이 동시에 열리는 곳이죠. 당신의 글에 어울리는 ‘차가운 미학’이 있는 곳입니다. 당신은 제 VIP 자문 파트너로 소개될 것입니다. 익명성은 철저히 보장되며, 그곳의 '관찰자'가 되어 글을 써주면 됩니다."


시안은 자신의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혜진에게 자신의 가장 화려하고 위험한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초대장을 건네고 있었다. 그것은 벽 뒤에서 뻗어 온, 침묵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손이었다. 그는 혜진에게만큼은 익명성을 지키고 싶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했다.


혜진은 메시지를 읽었다. 레리트 데 자르(L'elite des Arts) 아트센터. 그녀는 인터넷 검색창을 켜고 그곳을 검색했다. 화면 가득 펼쳐진 최상층부의 통유리 전경은, 그녀가 쓰는 잉크만큼이나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미학을 뽐내고 있었다. 그의 명품 피드의 고급스러움이 이 공간과 겹쳐졌다. 그녀의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차갑고 거대한 벽 뒤의 세계였다.


그녀는 만약 이곳에 간다면 자신이 철저하게 관찰 대상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이영'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갈망 사이에서 흔들렸다.


혜진은 천천히 폰을 들어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당신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겠습니다. 그 벽 뒤의 세계, 한 번 들여다보죠."


벽 뒤에서 뻗어 온 침묵의 손을, 혜진은 잡았다. 이제 두 사람은 현실이라는 위험한 다리 위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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