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남자, 큐레이터 2_9

에피소드 9_ 선물 같은 아이

by 새벽별노리

결혼식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이언은 특유의 '큐레이터적 기질'을 발휘해 가족계획에 돌입했다. 신혼여행 가방도 채 풀지 않은 서재 책상 위에는 2세 구성을 위한 완벽한 환경 큐레이션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바인더가 놓여 있었다.


이언

"담미 씨, 아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설치 미술'과 같아요. 유전적 조화부터 방의 조도, 교육 동선까지 완벽하게 기획되어야 하죠. 여기 제가 설계한 '3년 내 임신 및 육아 로드맵'입니다."


이언은 아이조차 완벽하게 기획된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담미는 그 로드맵 위로 보란 듯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어젯밤 꾼 엉뚱한 태몽 이야기를 꺼냈다.


담미

"이언 씨, 계획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우리에게 던질 '의외성' 아닐까요? 꿈속에서 커다란 빵 부스러기가 황금빛으로 변해 우리 침대로 쏟아지는 걸 봤거든요!"

이언이 어이없다는 듯 담미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언

"하하하, 빵이요? 혹시 어제 야식 안 먹고 자서 배고팠던 거 아니에요?"


담미

"아니라니까요! 거실 문을 열었는데 갓 구운 식빵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요. 그 옆에 아주 화려하고 예쁜 과일 타르트 중 가장 빛나는 걸 골라 품에 안았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고소했는지... 꼭 우리처럼요!"

담미가 윙크를 날리며 검색창을 열었다.

[태몽: 식빵, 과일 타르트]

검색 결과

빵 꿈: 대표적인 '재복' 태몽. 집안에 풍요를 가져다주고 커리어에서 큰 성취를 이룰 아이를 뜻함.

화려한 타르트: 외모가 출중하고 재주가 많은 아이(주로 딸)를 상징.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적 기질.


이언

"거실이 온통 식빵으로 찼다면 우리 집이 빵집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 침대에 빵가루가 날린다는..."

이언의 투덜거림이 무색하게, 담미의 꿈은 정확했다. 그것도 아주 '더블'로. 담미의 뱃속에는 딸과 아들, 이란성쌍둥이가 세상이라는 무대로의 화려한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언의 완벽했던 '1인 육아 로드맵'은 쌍둥이라는 변수 앞에서 무참히 깨지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검진실

초음파 화면에 두 개의 작은 점이 깜빡인다. 의사가 무덤덤하게 말한다. "쌍둥이네요. 축하합니다."

담미는 "내 빵 꿈이 맞았어! 식빵 하나, 타르트 하나!"라며 환호하지만, 이언은 손에 든 태블릿 PC를 떨어뜨릴 뻔한다. 그의 뇌 속에서는 '방 하나를 아이 방으로 꾸미기' 계획이 '2인용 가구 배치 및 동선 꼬임 방지' 시뮬레이션으로 급격히 수정되며 과부하가 걸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언은 집에 오자마자 바인더를 펼쳐 '3년 로드맵'을 '즉시 실행'으로 수정한다.


이언

"담미 씨, 이건 비상사태입니다. 큐레이션의 방향을 전면 수정해야 해요. '1인 중심의 미니멀리즘'에서 '2인 중심의 효율적 맥시멀리즘'으로 갑니다. 일단 저 식탁부터 치우고 기저귀 교환대 두 개를 병렬 배치해야겠어요."


담미

"이언 씨, 진정해요. 애들이 무슨 조각상이에요? 그냥 같이 빵 먹으면서 즐겁게 키우면 되지!"



태교의 현장

이언은 아이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위해 거실에 모차르트 음악을 틀고 엄선된 명화를 걸어두려 한다. 하지만 입덧이 시작된 담미의 요구는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


담미

"이언 씨... 모차르트고 뭐고... 지금 당장 꿈에서 본 그 '금가루 뿌려진 황금색 식빵' 안 사 오면, 나 이 설치 미술 전시 취소할지도 몰라요."

이언은 생전 가본 적 없는 동네 재래시장 빵집을 뒤지며, '완벽한 육아'란 결국 '완벽하게 계획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담미의 태몽은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이 아니었다. 며칠 뒤, 이언의 메일함에 믿기지 않는 소식이 도착했다. 3년 전, 이언이 "예술성이 결여되었다"며 혹평하고 헐값에 매각했던 외곽 지역의 폐공장 부지가 신도시 핵심 상업지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언

(안경을 고쳐 쓰며 손을 떤다) "담미 씨... 그 폐공장 부지 말이에요. 거기가 지금 거대 베이커리 타운으로 개발된대요. 보상금이... 우리 쌍둥이 대학 등록금까지 '금박'을 입힐 수준이에요."

담미는 입에 앙버터 빵을 문 채 평온하게 대답했다.


담미

"거 봐요, 내 꿈속 빵 부스러기가 황금으로 변해서 침대로 쏟아졌댔죠? 이제 우리 애들은 '빵수저' 물고 태어나는 거예요."

이언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치밀한 재테크 포트폴리오보다 담미의 '탄수화물 기반 예지몽'이 더 정확하다니. 그는 서재 벽면에 붙은 '성공적인 부의 축적' 그래프 위에 커다란 식빵 스티커를 붙이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유모차 시승기

재복은 해결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완벽한 하드웨어'였다. 이언은 쌍둥이용 유모차를 고르기 위해 대형 영유아 편집숍을 찾았다. 점원은 이언의 포스에 눌려 뒷걸음질 쳤다.


이언

"이 모델, 코너링 시 하중 분산 설계가 어떻게 됩니까? 쌍둥이가 한쪽으로 쏠렸을 때의 전복 방지 댐퍼(Damper) 수치를 확인하고 싶군요. 타이어는 광폭입니까? 아이들의 뇌세포 보호를 위해 노면 충격을 0.01G 단위로 흡수해야 합니다."

이언은 매장 바닥에 직접 누워 유모차의 서스펜션을 확인하더니, 급기야 본인이 직접 유모차를 끌고 매장 내 장애물 코스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언

"담미 씨! 이 모델은 훌륭해요! 공기 저항 계수가 낮아서 직선주로에서 완벽한 가속이 가능합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 복도를 전력 질주해도 작품 하나 건드리지 않을 정교함이에요!"


담미

"이언 씨, 그건 유모차지 스포츠카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애들은 루브르가 아니라 동네 놀이터에 갈 거라니까요?"

담미는 매장 구석에서 예쁜 리본이 달린 아기 신발을 신겨보며 행복감의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언은 스톱워치를 들고 유모차의 'S자 슬라롬' 기록을 측정하며 진지하게 육아 로드맵에 '유모차 드라이빙 테크닉' 섹션을 추가했다.


큐레이터 아빠의 눈물겨운 타협

그날 밤, 이언은 쌍둥이 방의 조도를 체크하다가 문득 담미가 사 온 '식빵 모양 무드등'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미학적 가치가 떨어진다"며 치웠을 테지만, 이언은 조용히 스위치를 켰다.

노란 불빛이 방 안을 고소하게 채웠다.


이언

(혼잣말로) "음... 확실히 이 색온도는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군. 2,700K(켈빈) 정도의 따뜻한 식빵색이라... 나쁘지 않아."

이언은 결국 자신의 두꺼운 바인더 17페이지, '조명 계획' 항목을 지우고 정갈한 글씨로 적어 넣었다.

<특이사항: 갓 구운 식빵색 조명 사용 권장 - 담미의 직관을 존중할 것.>


쌍둥이의 태명은 '슈슈(ChouChou)'로 정해졌다. 프랑스어로 '양배추'라는 뜻에서 유래해 '귀염둥이'를 의미하지만, 담미에게는 입덧을 잠재울 유일한 구원투수, '슈크림(Chou à la crème)'의 줄임말이기도 했다.


담미

"이언 씨, 그냥 빵으론 안 되겠어요. 입안에서 에투알 개선문의 아침 안개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면서도, 버터의 풍미가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을 닮은... 그런 맛이 필요해요."

이언은 즉시 기획안을 수정했다. <슈슈의 미각 세포 형성을 위한 빵집 큐레이션: 파리 정통성 편>. 그는 서울 시내의 프랑스인 셰프가 운영하는 블랑제리를 엑셀 시트에 정리해 도장 깨기에 나섰다.


이언

"담미 씨, 여기는 밀가루를 프랑스 '그랑 물랑(Grands Moulins)'사 제품만 씁니다. 습도 조절까지 파리 기상청 데이터에 맞췄다고 하더군요. 자, 이 크로와상의 기공을 보세요. 마치 조각품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담미는 한입 베어 물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담미

"아니에요... 이 맛이 아니야. 이건 너무 '계획된 맛'이에요. 좀 더... 낭만적이고 엉뚱한 맛이 필요하다고요!"

이언은 절망했다. 이제는 빵의 온도계와 타이머를 들고 직접 주방에 들어갈 기세였다.


품격 있는 태교, 시와 음악, 그리고 반전의 태동

입덧에 시달리면서도 담미는 '슈슈'들을 위해 지극히 우아한 태교를 시작했다. 거실에는 늘 정제된 클래식 선율이 흐르고, 담미는 벨벳 의자에 앉아 시집을 낭독했다.

담미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슈슈야, 들리니? 이 리듬이 너희의 영혼을 맑게 해 줄 거야."

이언은 그 옆에서 대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설계한 '정서 지능(EQ) 발달 커리큘럼'이 드디어 빛을 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담미가 시 낭송을 멈추고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담미

"어머! 이언 씨, 얘네 봐요! 방금 시 읽어줄 때는 가만히 있더니, 내가 실수로 떨어뜨린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빠라빠빠빠~' 하는 CM송에 엄청 세게 발차기를 했어요!"

이언

"설마요. 우리 슈슈들이 그 저급한 상업적 징글에 반응할 리 없습니다. 이건 분명 바흐의 대위법적 구조에 감명받은 고차원적 태동일 겁니다."

담미는 장난기가 발동해 몰래 리드미컬한 팝송을 틀었다. 그러자 뱃속의 슈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댄스파티'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언이 당황하며 다시 베토벤을 틀자, 아이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예술적 타협, '힙'한 태교의 탄생

이언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완벽한 큐레이션'이 아이들의 '힙한 본능'에 밀리다니. 하지만 그는 곧 이언답게 상황을 분석했다.

이언

"음... 생각해 보니 예술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죠. 우리 슈슈들은 고전주의에 머물기보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팝아트'를 지향하는 선구자적 기질이 있나 봅니다."

그는 즉시 태교 리스트에 '재즈와 시티팝'을 추가했고, 빵집 투어도 '가장 비싼 곳'이 아닌 '가장 창의적인 숨은 맛집'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담미

"이언 씨, 지금 우리 슈슈가 '슈크림 빵' 먹고 싶대요. 저기 골목 끝에 할머니가 구워주는 그 빵집 있잖아요!"

이언

"할머니의 손맛이라... 비정형적 미학이군요. 좋습니다. 슈슈들의 영감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죠!"

이언은 정장 차림으로 비닐봉지를 휘날리며 동네 빵집으로 뛰어갔다. 큐레이터 아빠의 자존심보다 '슈슈 엄마'의 입맛과 '쌍둥이의 댄스'가 더 소중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