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의 지도

향기, 나의 뇌에 말을 걸다.

by 새벽별노리


향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넘어, 우리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진단하고 필요한 위로를 건네는 비밀스러운 언어와 같다.

“왜 그랬을까. 아, 왜 그랬을까…. “


두 해 동안 잊힌 채 닫혀 있던 붓빨이 용액의 뚜껑은 이미 그 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화구 박스를 들어 올리자마자, ’두룩!‘ 소리와 함께 뚜껑이 얄밉게 풀리고, ’ 콸콸콸‘ 소름 끼치는 물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특유의 향이 순식간에 공간을 채웠다. 오랜만에 열어본 화구 박스를 옮길 때의 부주의함이 문제였다.

뒤섞인 박스 안에서는 붓과 물감 튜브들이 서로 부딪치며 ’딸깍‘, ’덜그럭‘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화구 박스 안은 금세 차가운 용액으로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얼룩 하나 남기지 않을 무색의 액체가 이토록 난감할 줄이야.


“아, 이런. “


그 와중에도 손은 자연스럽게 물감 튜브를 향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통통하게 채워진 튜브 안에서 꿈틀대는 듯한 컬러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테레핀 오일의 알싸하고 강렬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마치 CT 촬영 시 주사하는 조영제처럼,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찌릿하게 화끈거리면서도 동시에 차갑게 식어가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물론 조영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감각이었지만, 손끝에 남은 그 미끌거리는 차가움. 휘발성 강한 테레핀 특유의 향이 자아내는 묘한 이질감 속에서, 오히려 나는 기분 좋은 향수를 느꼈다.


오래된 나무와 굳은 물감, 그리고 세월의 먼지가 뒤섞인 화구 박스. 그 안에서 테레핀 향이 과거의 모든 냄새와 뒤섞여 잊고 지냈던 순간들을 불러왔다.

겹겹이 쌓인 향은 묘하게도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든다.


어릴 적 유화실에서 향기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은 어쩌면 뇌가 이미 향의 치유력을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구를 구매하고 VIP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한 모임에 초대받았다. 때마침 스트레스로 압박감이 상당했던 시기라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까 싶어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향수 테라피는 단순한 냄새를 넘어 내면에 잠들어 있던 지적 호기심까지 일깨웠다.




그중에서도 뿌리 향을 맡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복잡했던 마음과 머리가 신기할 만큼 차분해졌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니, 이 향은 과도하게 뇌를 사용해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향이라고 했다. 내 몸이 먼저 답을 찾았던 것이다. 향기라는 비밀스러운 언어를 통해 내 몸이 지쳐가는 나에게 '잠시 쉬어가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심오한 뿌리 향이 내 깊은 곳을 다독여주었다면, 페퍼민트 잎에서 나는 상쾌한 향은 막혔던 코를 단숨에 뚫어주는 확실한 구원자였다. 뇌의 욱신거림을 잠재우는 차분함, 그리고 막혔던 숨길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시원함. 이 두 가지 향의 경험은 지쳐있던 몸과 마음에 가장 필요했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향에 이토록 강렬하게 영향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향기 분자는 코를 통해 후각 신경을 직접 자극하는데, 이 신경은 감정, 기억, 스트레스 반응을 담당하는 뇌의 변연계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덕분에 특정한 향은 의식적인 사고 과정 없이 곧바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페퍼민트 향이 코를 뚫어줌과 동시에 정신을 맑게 하고, 뿌리 향이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향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넘어, 우리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진단하고 필요한 위로를 건네는 비밀스러운 언어와 같다.



<에필로그>

향기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다.

오랜 시간 굳은 물감과 먼지 속에 잊혔던 테레핀 향처럼, 혹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낯선 향기처럼, 향기는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어쩌면 향기를 통해 받은 자극은, 지쳐가던 나에게 건네는 가장 은밀하고도 강력한 위로였다.

뇌의 과부하로 욱신거리던 머리, 막혀 있던 숨, 복잡했던 마음까지. 이 모든 것을 다독여준 것은 다름 아닌 향이다.


향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넘어, 우리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진단하고 필요한 치유를 전하는 비밀스러운 언어와 같다. 그리고 그 언어는 자신의 삶 속 가장 솔직한 순간에 조용히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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