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친절의 파동
<작은 친절의 파동> 5
다음 배송지는 아파트 단지 내의 큰 마트였다. 마트 뒷문으로 들어가 창고에 물건을 내리고 나오려는데, 계산대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종혁은 고개를 돌렸다.
“어머, 기사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힘드시죠?”
김선아였다. 30대 초반의 마트 직원인 그녀는 언제나 밝고 친절했다. 종혁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살갑게 말을 걸어주던 터였다. 그녀는 계산대 뒤에서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종혁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피곤한 일상에 내리쬐는 작은 햇살처럼 느껴졌다.
“네, 뭐. 늘 그렇죠.”
종혁은 피식 웃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의 미소는 방금 전 민지오에게서 느꼈던 무거운 감정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날도 더운데 힘내세요! 아, 저희 오늘 신선 코너에 수박 엄청 달아요! 퇴근하실 때 하나 사 가세요!”
선아는 싱그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래야겠네요. 수고하세요.”
종혁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를 나서며 그는 선아의 미소를 다시 떠올렸다. 박노인의 짜증, 민지오의 무관심 속에서, 슬아의 따뜻함과 더불어 김선아의 친절함은 종혁에게 희망의 작은 조각처럼 다가왔다. ‘예의 바른 청년을 볼 때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너그러워지며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다.‘ 김선아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종혁의 지친 하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날 저녁, 모든 배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종혁은 운전대를 잡은 채 문득 오늘 하루 마주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무례함으로 가득했던 박노인의 굳은 얼굴, 감정이 메마른 듯했던 민지오의 무관심한 눈빛, 그리고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다가와 위로를 건넨 슬아와 김선아. 편의점에서의 풋풋한 대학생 커플의 맑은 웃음소리, 버스 안에서 해맑게 웃던 어린아이의 티 없는 얼굴까지. 각자의 사정으로, 혹은 그저 습관처럼,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종혁은 생각했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누가 안 살겠는가. 이익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자신만 잘 살겠다고 언젠가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비열한 행동을 보인 이들도 그렇게 살아감을 보았는데 보이는 것과 행해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더 확실히 알았다.‘ 비열한 행동으로 자신만을 보호하려 들었던 사람들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냉정한 현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무엇이 죄인가 싶지만, 돈 벌기 힘든 세상이라 맞닥뜨리는 순간 그런 구조로 돌아감을 이해하다 싶다가도 이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입술을 깨물고 만다.‘ 그는 자신 또한 그런 비열한 모습에 물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의 다짐은 메마른 땅에 뿌리내린 작은 새싹처럼 견고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고단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작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모든 ‘화‘를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슬아와 김선아, 그리고 이름 모를 버스 안의 아이처럼, 작은 친절과 순수한 미소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긍정적인 힘을 믿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결국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작은 배려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