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싣는 사람들 4편

무관심의 무게

by 새벽별노리


<무관심의 무게> 4


다시 트럭에 올라탄 종혁은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좁은 길을 빠져나왔다. 막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 옆 차선에서 거대한 버스가 스르륵 와서 멈춰 섰다. 엔진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종혁은 무의식적으로 버스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던지는 것은 그에게 짧은 휴식과도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승객들 사이로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자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7살 미만으로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창밖 풍경을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순간 종혁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해맑게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했고, 아무런 조건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종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삭막했던 마음속 어딘가가 스르륵 풀리는 것만 같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아이의 웃음은 잊었던 동심과 무해한 행복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찰나의 눈 맞춤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관계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버스는 덜컹거리며 먼저 출발했다. 종혁은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핸들을 잡았다. 버스가 남긴 묵직한 공기의 잔흔이 그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향한 도착지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였다.


아파트 단지는 언제나처럼 복잡했다. 낡은 아파트 단지는 유난히 주차 공간이 부족했다. 이리저리 헤맨 끝에 겨우 트럭을 세우고, 종혁은 카트에 박스 몇 개를 싣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엘리베이터 안은 답답했고, 낡은 조명은 어슴푸레하게 깜빡였다.


12층.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살짝 열리고, 앳된 얼굴의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민지오, 스물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종혁의 지인이다. 며칠 전, 그녀가 개인적으로 주문한 물건 배송 문제로 종혁에게 직접 연락을 해온 터였다. 그녀는 종혁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완전히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를 피로감과 경계심이 깊이 서려 있었다.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흐릿했다. 마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사람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민지오는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평소 고객들을 응대할 때처럼 형식적인 톤, 감정이 배제된 말투였다.

“네, 물건 가져왔습니다.”

종혁은 박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혹시 송장 확인 한번….”

민지오는 박스를 흘긋 보더니 손짓으로 됐다는 시늉을 했다.

“네, 됐어요. 그냥 두세요.”

그녀의 말투에서는 귀찮음이 역력히 묻어났다.

종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보통은 내용물 확인까지 시켜주는데, 그녀는 유난히 무관심했다.


“안에 깨지기 쉬운 물건인데, 한번 확인해 보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를 파손에 대비한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아, 괜찮아요. 설마 깨졌겠어요. ”

민지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종혁은 그녀의 태도에서 깊은 피로감을 읽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고객들의 불만과 짜증을 받아내며 그녀의 감정도 닳아버린 걸까. 종혁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박스를 현관 안쪽에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수고하세요.” 민지오는 문을 닫으며 짧게 인사했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왠지 모르게 무겁게 울렸다.

종혁은 닫힌 문을 등지고 서서 멍하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박노인의 거친 불평과는 또 다른, 무미건조한 무관심이 그의 마음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다. 어쩌면 민지오도 오랜 감정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관계의 벽을 쌓아 올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의 무관심은 외면이 아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처절한 방어막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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