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싣는 사람들 6편 (완결)

무게 속의 희망

by 새벽별노리


<무게 속의 희망> 6


며칠 뒤, 종혁은 다시 민지오의 아파트 단지로 배송을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집이 아닌 다른 동이었다. 배송을 마치고 나오던 길, 그는 우연히 단지 내 벤치에 웅크린 듯 앉아있는 민지오를 발견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든 채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고 있었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뒷모습에 종혁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낡은 벤치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마저 그녀의 그림자를 더욱 길고 외롭게 만들었다.


그녀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민지오의 휴대폰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아니, 고객님!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건 저희 규정상 안 된다고요! 네? 아니, 저도 사람이에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핏발 선 눈가는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냈다.


종혁은 그녀가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지난번 자신의 배송 때 보였던 무관심이 어쩌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처절한 방어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종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민지오 씨?”


민지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종혁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붉어진 눈가가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어… 기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떨림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배송 왔다가… 잠시 쉬고 계신 것 같아서요.”


종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시원한 캔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캔은 차가웠지만 그의 손은 따뜻했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목 많이 아프시죠.”


민지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그녀의 딱딱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보였다. 눈빛에 흐릿했던 초점이 돌아오는 듯했다.


“아… 괜찮은데….”

그녀의 손이 캔커피를 받아 들 때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종혁은 놓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도 일하다 보면 목마를 때가 많아서요.”


종혁은 슬아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민지오는 캔커피를 꽉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 통화할 때와는 달리 가늘게 떨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가에는 기어코 물기가 맺히더니, 이내 뜨거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맨날 욕만 듣다가… 이런 친절은 오랜만이라서요.”

그녀의 말에 종혁은 가슴이 저릿했다.


‘화가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그 문장이 다시금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툭, 두드려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작은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민지오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캔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작은 친절 하나가 그녀의 굳어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인 듯했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감정의 짐이 잠시나마 내려놓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종혁은 배송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주민들에게 먼저 가볍게 목례를 하거나, 경비원 아저씨에게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쓰레기가 널브러진 곳을 지나칠 때면, 잠시 멈춰 서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그의 작은 행동들이 주변의 굳어있던 분위기를 미세하게나마 바꾸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종혁은 박노인의 집으로 다시 배송을 가게 되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택배 왔습니다, 어르신. 오종혁입니다.”


종혁은 이전보다 조금 더 또렷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박노인이 나왔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종혁은 이번에는 먼저 말을 걸었다.


“어르신, 요즘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노인은 예상치 못한 인사에 눈을 가늘게 떴다. 굳게 닫혀 있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는 듯했다.


“흥, 웬일로 젊은 놈이 싹싹하네.”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전처럼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박스를 받아 들고 돌아서려던 노인이 문득 멈칫했다.


“야, 너 저번에 갖다 준 그 박스 말이야. 안에 깨진 거 하나도 없더라. 튼튼하게 잘 왔어.”


칭찬이 서툴러 오히려 더 진심 같았다. 노인의 굳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짧은 칭찬은 종혁에게 예상치 못한 작은 기쁨을 주었다.

종혁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노인에게서 칭찬이라니. 희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네. 다행입니다, 어르신.”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됐어. 얼른 가 봐. 바쁠 텐데. “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종혁은 닫힌 문 앞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노인의 태도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작은 변화였다.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들이 쌓여 관계의 틈을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세상의 모든 ‘화’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그 불씨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고단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확연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모든 ‘화’를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슬아와 김선아, 그리고 이름 모를 버스 안의 아이처럼, 작은 친절과 순수한 미소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긍정적인 힘을 믿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결국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작은 배려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어렴풋이 아닌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내일도 그는 박스로 가득 찬 트럭을 몰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굳건한 다짐과 함께, 어쩌면 그 자신이 먼저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를 건넬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삭막한 세상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 시작되기를 염원하며, 종혁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트럭을 세웠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향했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의 존재임을, 그리고 그 무게 속에서도 작은 빛을 찾아나가는 희망이 있음을 그는 믿었다. 그의 어깨에 얹힌 짐은 여전했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진 밤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끝


무게를 싣는 사람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필로그*

이 스토리는 우리 사회관계의 문제점들을 종혁의 일상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박노인의 무례함, 민지수의 무관심, 그리고 슬아와 김선아의 친절함, 어린아이의 순수함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화가 많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죠. 종혁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자'는 다짐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와 희망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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