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지도 1편

편견을 넘어서는 아름다움

by 새벽별노리


어스름한 새벽, 도심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

매일 밤 같은 꿈을 꾼다.

낡은 무용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위에서 홀로 춤을 추는 꿈. 땀으로 축축한 연습복, 숨 가쁜 호흡, 그리고 창백한 달빛 아래 거울 속에는 끝없이 완벽을 갈망하는 내가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게 발레는 고독한 투쟁이자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멈출 수 없는 열망은 나를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

차가운 빌딩 숲으로 이끌었다.

이곳에서 나는 발레리나라는 가면을 쓰고,

완벽한 백조가 되기 위해 고독한 싸움을 계속한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 있다.


우아한 백조의 몸짓 아래 숨겨진 거친 날개.

이 사각의 지도 위에서 길을 잃은 채, 나만의 춤을 추고 있다. 나의 춤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지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언젠가 프랑스 국립발레단 출신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무대 위의 무용수 (The Star)처럼 우아하고 눈부셨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에도,

잘게 떨리던 그녀의 근육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숨겨진, 끊임없는 연습과 고통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발레라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은,

바로 무대 뒤에 숨겨진 그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에드가 드가의 그림 ‘발레 수업(The Ballet Class)‘ 이 떠올랐습니다. 그림 속 지친 표정의 무용수들처럼, 그녀의 근육들은 얼마나 많은 땀방울로 만들어졌을지 짐작하게 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저는 벽 뒤에 숨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와의 인연은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보다 큰 체구의 그녀가 발레리나 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스포츠 센터의 강사 선생님이었던 그녀와 저는 복싱 수업에서 서너 번 대련 상대를 맞추곤 했습니다.


어릴 적 태권도를 배워 민첩했던 저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하체 킥으로 저보다 큰 상대들을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제 겉모습과 달리 강한 내면의 힘을 보여주는 순간들이었고, 덕분에 라이트급 챔피언에 나가보자는 강사님의 웃픈 권유도 받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바로 그때, 미끄러운 잔디 위에서 스타트부터 발을 헛디디고 강사님과 스파링 중 균형을 잃는 순간을 담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처음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잘 웃지 않고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프랑스인들은 원래 그런가 ‘라는 편견을 가졌습니다.


과거에 항상 잘 웃던 저는 프랑스에서 지내며 몇 가지를 노력해야 했습니다.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는 것,

지하철에서 웃지 않는 것,

그리고 부끄러워도 먼저 인사하는 것,

“Bonjour!”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터득한 것은 가능한 단골 상점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카페, 빵집, 슈퍼마켓, 심지어 그리스식 식료품 상점에서조차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다가가면 경계심을 풀고, 그 노력을 무례함이 아닌 무해함으로 반겨주었습니다. 마치 친절의 마일리지를 쌓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들도 저와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용기를 내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던 날,

그녀는 수업 전, 텅 빈 교실에서 발레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녀가 발레리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왜 그녀의 몸이 그토록 섬세한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상과 번아웃으로 잠시 쉬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 다시 도전 중이라고 했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제 편견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이 나온 유명한 발레학교에 강사로 지원해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녀의 앞날을 응원하며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제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발레의 아름다움이 무대 뒤의 숨겨진 열정에서 나오듯,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 역시 겉모습 너머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 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183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1917년 사망한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사실주의자라고 불리기를 선호했습니다.

• 대표작/ 압생트 한 잔, 발레 수업, 벨렐리 가족 etc.


에필로그

발레리나와의 만남은 새로운 '시각의 지도'를 선물했습니다.


저는 킥복싱이라는 운동에 대해 과격하고 위험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링을 통해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민첩함과 힘이 존재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녀 역시 드가의 그림처럼, 우아함 뒤에 숨겨진 땀과 노력의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차가운 표정 뒤에는 따뜻한 친절이 숨겨져 있었고,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냈을 때 비로소 그 지도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모두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탄생하듯,

사람의 가치 역시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열정과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각의 지도‘를 넓히는 것은 결국,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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