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아르헨티나의 깊은 밤

제19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by 그루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멘도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는 15시간 이상 걸린다. 저녁 7시 45분 출발이니 정시에 도착해도 내일 오전 10시 45분에 도착 예정이다.


버스비가 좀 들더라도 비행기 값과 비슷한 가격이지만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버스표를 구입했다. 아르헨티나의 버스 등급에서 가장 좋은 것은 Cama다.‘침대’라는 뜻으로 그 아래 등급으로는 세미카마가 있다. 세미카마만 타도 충분히 편하고 서비스도 좋지만 한 번쯤은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



너무 안락했던 버스



그것도 가장 앞자리인 1번과 2번, 버스는 2층으로 되어 있어서 2층의 1번 자리는 비행기로 치면 조종석 자리와 같다. 밤이지만 어쨌든 앞좌석 1, 2, 3번 자리의 뷰는 최고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같은, 좌석에 누우면 충분히 젖혀져 발도 길게 뻗을 수 있는 좌석 환경을 확인하고 타자마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바로 커피와 와인, 제대로 된 밥을 서비스해준다. 자꾸 제공해 주는 음료 및 간식들은‘아르헨티나 버스는 세계에서 가장 서비스가 좋은 버스’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하다.



비가 오는 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마치 창이 넓게 나있는, 비가 창을 두드리는 아무도 없는 호젓한 카페에 와 있는 듯 기분이 좋아 으쓱해진다. 버스는 제 속도를 지키며 미끄러지듯 비 내리는 아르헨티나의 깊은 밤을 달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지구


다음날 오전 11시경 호텔에 도착, 조금 기다렸다가 체크인, 근처의 오픈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호텔에서 먼 거리에 있는 내셔널 미술관이 있는 팔레르모지구로 나섰다.


이탈리아 광장에 도착하면 너무도 많은 팔레르모지역의 볼거리들이 넓은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어 무조건 보이는 대로 걷기 시작하면 정작 중요한 것들을 볼 때는 파김치가 되고 만다. 개인의 기호대로 적절한 안배가 필요하다.


타이스 식물원 옆 동물원에서 발견한 멋진 '닭'


우리는 이탈리아 광장부터 시작하여 타이스 식물원과 바로 옆에 위치한 동물원, 일본 정원을 통하여 술렁술렁 산책하듯이 걷다 보면 국립미술관 쪽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될 계획이었지만 워낙 넓은 지역이라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피곤했다.


리베르타도르 대로변에는 국립미술관을 비롯, 플로랄리스 헤네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장식미술관, 레골레타묘지 등 시간을 요하는 볼거리들이 몰려있다. “이 쪽을 먼저 보고 식물원이나 동물원, 정원이나 공원 등을 나중에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석양에 물드는 분홍빛 미술관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국립미술관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은 다운된 짙은 분홍빛의 차분한 색과 4개의 기둥이 마치 그리스 초기 도리아식 느낌처럼 간결한 느낌을 주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처마의 돌림띠 외에는 장식적 요소들이 없는 미술관 파사드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보기에 좋다.


국립미술관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


안으로 들어서면 모던한 느낌을 줄 정도로 실용적인 공간배치와 경로가 관람을 편하게 해 주는데 마치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이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혹은 ‘루브르’에 온 것처럼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의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윌리엄 부게로, 에드가 드가, 로댕, 고흐, 고갱, 세잔, 모딜리아니, 르누아르, 샤갈, 피카소 등 19세기와 20세기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은 물론 루벤스, 렘브란트의 작품까지 수두룩하다. 걸려있는 것이 이 정도인데 창고에 있는 것은 얼마나 대단할까. 슬그머니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생각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꼭 습관처럼 그 곳에서 고픈 배를 해결한다. 배가 고프지 않다면 간식이나 커피라도 꼭 마신다. 경험 상 한 번도 맛을 배신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레스토랑을 찾고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만찬이 있는 것처럼 차량이 모이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다. 아쉽지만 오늘 밤 이곳에서의 만찬은 그냥 접기로 했다.


낮 동안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들로 오갔던 조명으로 장식된 레골레타 묘지와 주변의 상가들은 한산하다.

오늘 밤도 역시 멘도사에서부터 시작된 아르헨티나산 와인 사랑, 너무나 돌아다녔던 피곤함 때문인지 맛 좋은 아사도와 함께 두 병을 해치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