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에서 하마단으로
잔잔에서 고대 문명의 중요한 도시였던 하마단 Hamedan까지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도시가 가까워지자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이 역시 하마단이다. 하마단은 알반드Alvand산(3580m)이 감싸고 있는 해발고도 183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하며 기후가 서늘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궁전이 있던 곳이다.그 이전에는 엑바타나라고 부르는 메디아의 수도였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데이오세스Deioces가 메디아 왕국(기원전 728~550)을 세우고 지금의 하마단(엑바타나)에 수도를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의 페르시아에 복속된 후에도 우세한 메디아의 행정과 문화는 페르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메디아의 궁중의례는 그대로 수용되었으며 엑바타나는 제국의 여름수도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고대부터 층별로 켜켜이 시대를 간직하고 있는 하마단 시는 현대의 단 위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왕의 길의 중심이며 교역의 중심지였다.
왕의 길 the King’s Highway
키루스2세가 닦았던 길을 다리우스 1세가 제국 내로 확장하였다. 제국 내의 속주 Strapy를 연결하는 파발 목적의 도로였지만 조세징수와 교역로로 활발하게 사용한 실크로드의 통상로였다. 바빌론에서 하마단을 지나 페르세폴리스와 수사까지 이어진 길은 박트리아 지역이나 소그디아 지역의 중앙 아시아를 거쳐 천산 산맥을 기점으로 중국, 인도와 연결되었다.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었던 리디아 Lydia의 사르디스 Sardis를 지나 그리스를 잇는 왕의 길은 실로 실크로드의 원형이다.
왕의 길의 중심에는 하마단과 대상들의 도시였던 케르만샤 Kermanshah가 있다.
비수툰 Bisotun 입구
비수툰 Bisotun 유적
하마단 시내에서 출발하여 케르만샤 쪽으로 2시간 40여분을 달리니 고산 중턱에 황량한 암벽의 지형이 나타난다. 비수툰은 고대 무역로의 중심지였던 길목으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들이 발견되었다. 애초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땅은 선사 시대부터 메디아, 셀레우코스, 파르티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와 사산왕조 그리고 몽골제국의 일한국 시대까지의 유적이 시대를 초월하여 남아있다. 메디아 왕국부터만 시작해도 이곳은 그야말로 수 천년 동안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헤라클레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알렉산드로스 후계자의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가 세운 왕국(기원전 312~기원전 64)이다. 헤라클레스 The Seleucid Figure of Heracles를 암벽에 새긴 고부조는 2천 년도 더 지난 흘러간 시간이 무색하게 방금 조각한 것처럼 너무 온전하게 남아있다. 곱슬곱슬한 머리를 한 그리스 양식의 헤라클레스는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사자의 등 위에서 왼손에는 보울을 들고 앉아있다. 인물 표현 뒤에는 생명의 올리브나무가 보인다.이곳은 아마도 당시 헤라클레스를 모시는 신전이 아니었나 싶다.
이곳에는 아케메네스 왕조 이전의 왕국이었던 메디아 시대의 신전 터와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낸 파르티아 시대의 신전 터도 남아있다. 미트라다테스 2세와 Gotarzes2세의 부조와 명문을 비롯하여 파르티아 왕 Balas가 역시 둥근 그릇을 왼손에 들고 있는 부조도 볼 수 있다.
Seleucid Figure of Heracles
보이는가? 사자가, 뒤에는 올리브나무
미트라다테스 2세와 Gotarzes2세의 부조와 명문
다리우스의 비문, 어쩌면 다리우스의 쿠데타?
그중에서도 기원전 6세기 다리우스 1세의 업적이 새겨진 비문은 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유네스코 유적이 많은 이란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이 비문은 1835년 영국인 헨리 로린슨이 처음 발견하였으며 산의 꼭대기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 필사를 한 후 1846년에 설형문자 해독에 성공하였다.
키루스 2세(기원전 559~529)의 뒤를 이어 아들 캄비세스 Cambyses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 중에 반란 소식을 듣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재위 8년만인 기원전 522년, 이집트의 시와Siwa에서 갑자기 죽는다. 캄비세스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있었던 다리우스는 대 귀족 오타네스를 포함한 6명의 귀족들과 함께 메디아의 조로아스터교 사제였던 가우마타와 반란군을 진압한다. 비문은 기원전 521년 다리우스가 왕위에 오르는 즉위의 정당성과 명분을 그림(부조)과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한 언어였던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로 기록하였다.
공사중인 다리우스의 비문과 부조
다리우스(왼쪽)와 반란의 주모자들,가운데는 아후라마즈다
비문과 부조에는 기원전 521년 키루스 Cyrus왕이 창건한 페르시아 제국을 찬탈하려 했던 가우마타를 주축으로 한 반란세력과의 전투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다리우스와 귀족들이 죽인 ‘가우마타’는 캄비세스의 동생이며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7개월이나 왕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르디아’였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키루스의 아들이며 왕이었던 ‘바르디아’는 왕실과 혈연관계인 다리우스와 바르디아의 장인인 대 귀족 오타네스를 포함한 귀족 6명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는 진짜 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찬탈한 것이다. 비문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즉위에 대한 정당성을 뛰어난 책략과 선전술을 발휘하여 만 천하에 알린 것이다.
많은 쿠데타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다리우스1세(기원전 521~기원전 486)는 즉위하고 나서도 19번이나 일어난 반란과 내전을 진압하기 위해 2년 동안이나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통치기간에 아케메네스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인도의 일부와 소아시아까지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만든 왕이기도 하다.
아치의 파라다이스 ‘타케보스탄Taq-e Bostan’
비수툰 유적 가까이에 타케보스탄Taq-e Bostan이 위치한다. 타케보스탄은 ‘정원의 아치’란 뜻으로 당시 대제국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페르시아 사산왕조시대 왕들의 부조가 깊은 아치 안에 새겨진 곳이다.
바위를 깊게 파 들어간 아치에 고부조로 새겨진 조각들이 너무 오래 전의 유적이어서 놀랐다. 깊게 파 들어간 석조 아치에 새겨진 문양들을 보고 이슬람 건축에 많이 사용되는 이완 Iwan의 시작을 보았다.
큰 아치에는 호스로우(590~628) 2세의 모습이, 작은 아치에는 샤푸르 Shapour 2세와 3세(383~385)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후면에는 아후라 마즈다가 새겨져 있으며 군데군데 채색의 흔적도 남아있다. 아치 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왕이 사냥을 나가고 코끼리가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 뛰어다니는 사슴과 낙타 등이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고부조로 볼륨감 있게 새겨져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궁에 새겨진 부조가 생각날 만큼 뛰어나다.
아치에 표현된 풍경을 보면 비록 지금은 황량하지만 당시에 이곳은 신록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지저귀며 물고기가 노니는 풍부한 물이 흐르는(물은 지금도 흐른다)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다.
아치 옆 오른쪽에는 사산 시대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아르다쉬르 Ardashir 2세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왕권을 받는 장면이 미트라와 함께 부조로 새겨져 있다.
타케보스탄
아르다쉬르Ardashir 2세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왕권을 받는 장면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 ‘타키에 모아벤 올 몰크’
타케보스탄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타키에 모아벤 올 몰크 Takieh Mo’aven ol-Molk Hosseinieh를 보기 위해 케르만샤 Kermanshah 시내로 들어왔다.
시아파의 이맘으로 카발라에서 순교한(AD 680) 후세인을 기리는 시아파의 성지이다. 입구에서 깊게 파 들어간 계단을 내려가면 양파처럼 아래가 불룩하면서 위는 뾰족한 돔과 장미가 한가득인 아름다운 정원이 눈을 사로잡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규모가 무척 큰 모스크로 들어가면 카발라 전투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사건들이 타일 모자이크 벽화로 표현되어있다. 박물관도 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해 준다.
타키에 모아벤 올 몰크Takieh Mo’aven ol-Molk Hosseinieh
모스크벽에 가득한 타일벽화, 사건의 내용을 떠나서 표현력이 뛰어나다.
짧은 에필로그
고도 하마단에서 25일간의 페르시아 일정이 끝났다. 오랫동안 나의 버킷리스트였던 페르시아 여행을 마무리한다. 수천 년의 역사를 압축해서 봐야 했으므로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일렁이는 순간이 많았다.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것은 서울로 돌아가서 해야 할 나의 몫이다.
25일 동안의 여행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