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발리, 롬복 - 낭구, 땅콩, 수닥, 끄디스 섬
롬복으로
뇨만! 내일 아침에 롬복 들어가는데 공항까지 데려다 줄래요?
굳이 뇨만의 차를 타지 않아도 되건만, 어젯밤 짐바란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에서 내리면서 뇨만에게 내일 아침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을 했다. 11시 25분발이지만 조금 일찍 8시 반에 뇨만의 차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워에 늦어질까 좀 일찍 출발했는데, 꾸따에서 응우라 라이 공항은 정말 가깝다.
17,0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여서인지 기차나 버스보다도 항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 보인다. 내가 출발하기 30분 전에도 롬복행 비행기가 한 대 뜬 것을 보면 롬복과 발리 간 비행편수도 꽤 많다. 인도네시아 국내 항공을 서너 번 타본 것이 고작이지만 그때도 좌석은 현지인들로 만석이며 시간도 대체로 정시에 출발했었다. 하긴 인구가 약 2억 6천만 명이라고 하니 어떤 교통수단에도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정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이륙한 지 30분도 되기 전에 녹색의 섬 롬복 공항에 착륙했다. 발리와 롬복 사이의 해협을 가로질러 가는데 구름 위에 솟아있는 발리의 아궁산이 보이는 것을 보면 낮은 비행은 아니건만 놀랍게도 투명한 바닷속의 모습이 다 보인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쫘악 벌리고 훤히 보이는 바닷속을 확인하느라, 구름 위에 솟아있는 아궁산을 찍으랴, 이륙하자마자 건네준 빵과 땅콩, 물이 들어있는 간식 상자를 해체하며 재미있어하랴 아! 30분은 너무 짧다.
롬복 공항을 나오다 보니 왼쪽으로 공항 택시 서비스 센터가 있다. 승(셍)기기Sengigi까지 간다고 하니 220,000만 루피아를 내란다. 에이, 하면서 20만 루피아(한국 돈 이만 원 정도)에 가지고 했더니 흔쾌히 따라오란다. 인도네시아는 공공시설에서도 흥정을 한다. 삐끼와 협상하는 것이 고객 편에서 보면 바가지를 쓰지 않기 위해 긴장도 되는 한편 피곤하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이며 이것 또한 이들의 얼굴이다.
택시는 공항이 위치한 롬복 남부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승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먼지, 야자나무와 논 풍경이 있는 시골길을 정처 없이 간다. 민가가 이어져도 길가에는 알록달록하게 치장한 발리의 힌두사원들이 보이지 않아 담백함과 허전함이 교차한다. 눈을 돌려 사원을 찾아보면 양철로 만든 둥글고 뾰족한 첨탑이 이슬람 사원임을 알려준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발리의 영주들에 의해 다스려졌지만, 롬복 토착민인 사삭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한참을 지나니 드라이버는 낮은 건물들 옆을 지나가면서 이곳이 롬복의 수도 마타람Mataram이라고 하고, 한 시간 가까이 오니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수도였던 암빼난Ampenan이라고 한다. 17세기 유럽의 최강 무역대국으로 발돋움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침략은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발리와 롬복을 비롯한 소순다 열도의 섬들은 상업적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는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야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놓인다.
승기기에서 환전은 BMC에서
한 시간도 더 가는 택시를 타면서 22만 루피아가 비싸다고 20만 루피아에 흥정을 한 것이 살짝 미안해질 즈음 구글 지도를 보니 화살표는 승기기 쪽으로 열심히 가고 있다. 멀긴 멀다.
롬복 섬과 발리 섬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제주 아일랜드!, 발리는 제주섬의 3배이며 롬복은 2.5배에 달한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미비한 면적이지만 제주섬과 비교하면 아주 큰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승기기 입구에 있는 BMC환전소가 보여 기사님께 잠깐 세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넉넉하게 환전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발리에서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쓰게 된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꾸따에서 아침을 먹고 산책 겸 비치워크 지하에 있는 환전소를 갔는데 10시에 오픈한다고 한다. 현금인출카드인 EXK카드만 믿고 롬복으로 그냥 넘어왔는데, 환율이 꾸따보다 좋은 BMC를 다녀오니 기분도,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Lazy Monkey’
승기기 중심가에서 조금 더 올라가 롬복에서 보내는 7일 중에 이틀을 지낼 첫 숙소에 도착했다. ‘Lazy Monkey’ 얼마나 귀여운 숙소 이름인가, 하지만 너무나 소박한 숙소의 대문을 보는 순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나, 이미 내가 예약한 숙소인 것을,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니 하! 조금은 호들갑스러워 보이는 직원이 웃으며 반갑게 맞아준다. 잭 프룻과 망고나무가 있는 소박한 열대 정원을 지나니 한 백인 남자가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온다. 순간 또 한 번 실망, 순진하게도 내가 예약한 숙소가 외국인이, 그것도 백인이 주인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호텔을 예약할 때 내가 보는 것은 숙소 위치와 깨끗한 침실, 그리고 조식이다. 그러니 얼토당토않은 자격지심으로 주인이 현지인이 아닌 것에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는 것을.
커다란 방이 4개로 이루어진 게스트 하우스 형식의 숙소는 주인장의 엔틱한 취미를 보여주는-망가질까 다소 부담스럽지만-장식품들이 많다. 수영장도 락스 냄새가 안 나고 어딜 가든지 구석구석 쓸고 닦고 깔끔깔끔하다.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낭구 섬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들어와 물놀이에 생긴 빨래를 널어놓을 곳을 찾다가, 주인장 성격을 아는지라 눈치를 보며 수영장 옆 선 베드에 줄 맞추어 예쁘게 널었다. 잠시 방에 들어갔다가 널어놓은 빨래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나가보았더니 어느새 정원 구석에 건조대를 설치하고 빨래를 널어놓았다. 이러니 너무 깔끔해서 손님이 주인의 눈치를 보는 격이다.
롬복 남서쪽 바다, 낭구 섬에서 행복했던 하루
그냥 놀기 위해 온 곳이지만 놀 거리는 찾아봐야 한다. 마음만 있으면 각종 해양 스포츠들을 할 수 있는 투어들이 다양한데 호텔에서 문의를 해도 되지만 가격 비교를 하기 위해서라도 호텔 문밖만 나서면 투어 안내를 하는 입간판들이 줄을 섰다. 단체를 따라가는 것도 많지만 개인적인 맞춤 투어도 가능하다.
하루쯤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롬복 남서쪽에 있는 낭구 섬 지역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낚시도 할 수 없는 생물권 보호지역이라니 더욱 구미가 당긴다.
오전 9시 30분경 호텔로 찾아온 투어차량을 타고 승기기 중심가를 지나니 암뻬난이 나오고 마타람을 지나면서 한참 남쪽으로 내려간다. 가는 길에 암뻬난 재래시장에 들러 크고 싱싱한 과일을 사니 소풍 가는 것 맞다.
가이드 두딩Duding은 롬복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롬복에 대해서 물어보니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롬복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한국말을 잘 한다고 했더니 한국 일산에서 근로자 생활을 몇 년 하고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정도 한국말은 롬복에서 공부하고 간 것이고 정작 한국 사람과 만나 한국말로 대화할 시간은 거의 갖질 못했다고 한다. 자세한 상황이야 모르지만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낯이 화끈거리며 미안해진다.
남쪽 Lembar 항구 부근에 가니 대형 여객선들이 정박해 있다. 발리까지 운행하는 여객선인데 약 4시간 걸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리에서 롬복까지 비행기나 스피드보트를 타고 오기도 하지만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오는 방법도 있다.
Sekotong 지역의 Tawun 선착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배를 타고 바다와 하늘이 하나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가르고 낭구 섬으로 20여분가량 뱃놀이하듯 들어간다. 하얀색 비치가 눈에 들어오는 낭구 섬 Gilli Nanggu 안쪽으로 Gilli Tangkong, Gilli Sudak, Gilli Kedis 작은 섬 3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어린 시절 내가 그린 그림처럼 현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낭구, 땅콩, 수닥 3개 섬에는 소수지만 사람이 살고 있으며 끄디스 섬만 무인도라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거미를 닮은 알록달록 전통 배들을 보니 반가울 정도로 섬은 호젓하다.
가까이에는 화장실과 샤워실도 있는데 현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비치에 조성된 숲 뒤에는 인가가 있을 것이다. 하얀 비치에 닻을 내리고 나면 사방 어디에 들어가도 크고 작은 예쁜 물고기들과 놀 수 있다. 스노클링을 처음 한 것도 아니건만 이날 롬복 낭구 섬 바다에서 보낸 시간들은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맑은 바다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물고기들은 물론이고 오래전 침몰한 작은 침선마저도 깨끗한 바다 때문인가, 바닷속 산호와 같은 색깔을 띠며 오래된 고가구처럼 멋있다.
옥빛 바다 위에 속삭이듯 떠있는 섬들 사이를 다니면서 보냈던 하루, 수닥 섬에는 이곳 4섬 중 유일한 레스토랑이 있다. 메뉴도 간단하게 넓적한 생선을 숯불에 구워주는 것이 전부다. 물어보나 마나 밥 한 그릇 단숨에 꿀꺽이다. 나에게 꿈처럼 지냈던 그 하루가 다시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