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으로 의미가 있는 곳 ‘라싸Lhasa’에 왔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차 없이 달려드는 태양열이나, 3,650m의 높은 고도로 인해 느껴지는 울렁거림만 없다면, 라싸의 인상은 넓은 도로와 가로등이 정비된 회색으로 단장한 여느 중국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중국의 다른 성으로 떨어져 나간 캄(티베트 시장 동부 쓰촨 성)이나 암도(칭하이성) 땅이 티베트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1774년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티베트 제2의 도시인 '시가체Shigatse'에 들어간 적은 있지만,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로 들어가기 위해 탐험가와 학자들 또는 침략자들은 많은 희생과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더군다나 일반인이 들어가기에 라싸는 너무나 어려운 철옹성이었다.
그레이트 게임과 라싸- 탐험하고, 침략하고, 정복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15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유럽 제국주의의 20세기까지 지속된 식민지 쟁탈전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까지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인류에게는 재앙이었다. 마지막 남은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아시아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영하 35도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를 잃었다.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에 취한 러시아는 1813년, 아제르바이잔을 병합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이 1835년 인도에서 북쪽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중앙아시아를 향한 숨겨놨던 발톱을 드러내면서 게임이 시작됐다.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러시아와 인도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영국이 약 100여 년에 걸쳐 충돌하고 대립했던 사건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에게도 뼈아픈 시절로 안타깝게도 러시아의 방관과 영국과 미국의 묵인 하에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한 시기였다.
당시 영국과 독일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처럼 탐험하고, 침략하고, 정복하고 것이 국력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국가의 권익에 동원되고 앞장섰던 많은 탐험가와 학자 그리고 침략자들은 고국에서 부와 명예는 물론 작위를 받기도 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인 러시아의 군인이며 탐험가인 프르제발스키N.M.Przhevalskii(1839~1888년)는 조국 러시아의 이권을 위해 일했지만 수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70년 경 중앙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 일대를 조사하였으며 신장의 로프노르(뤄부포) 호수를 최초를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두 번이나 라싸 근처까지 갔지만 라싸 272㎞ 밖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위대한 탐험가이며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탐사와 지도제작을 위해 수십 년을 보냈던 스웨덴 사람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1865~1952)이다. 그의 저서 ‘티베트 원정기’에는 1890년부터 1901년 경, 말을 타면 하룻길에 불과한 거리에서 라싸 입성을 포기를 한 그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를 다녔던 그의 행로를 그려보면 마치 풀어헤친 실타래 같다. 그가 만들어놓은 지도는 현재까지도 유용한 정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목적이야 불문하고 그의 족적은 실로 위대하다. 다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인가, 확인한 자료는 아니지만 2002년 미국이 사용한 아프간 침공 때의 군사지도는 그의 지도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내겐 무척이나 특별한 다른 한 명은, 인류학자인 프랑스인 알렉산드라 넬Alexandra D.Neel(1868~1969)이다. 황제의 행렬에 버금가는 캐러밴을 꾸리고 탐험을 다녔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몇 번의 시도 끝에 1924년 10월 티베트인 수양아들 용덴과 함께 남장을 하고 윈난에서 출발하여 고행 끝에 라싸에 도착을 한 것은 1924년 2월,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1911년 그녀가 잠시 동쪽 중앙아시아로 떠난 여행은 라싸로 들어가는 여행을 마칠 때까지 14년의 세월이 걸렸다. 1890년 여행에서 만난 남편 필립Philipe Fancois Neel'은 수양아들 용덴과 함께 그녀에게는 평생 동안 우정 어린 친구였으며 또한 경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조력자였다. 이 대목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 필립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무한한 관대함과 믿음, 깊고 넓은 인간성과 가장 중요한 재정까지, 부러운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싸에 최초로 입성한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입성한 영국의 영허즈번드F. E. Younghusband(1863~1942)이다. 그는 티베트인들의 강한 저항을, 더 강력한 무기로 무너뜨렸다.
1888년 티베트를 문명화시킨다는 구실로 한 번 침략했던 영국은 1903년 2차 침략을 하고 1904년에는 영허즈번드 대령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네팔, 인도인, 영국인으로 꾸며진 영국령 인도군 원정대를 데리고 시킴을 지나 간체까지 가서 구식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게다가 거짓 평화조약을 미끼로 무기를 내려놓은 티베트 군을 몰살시켰다. 내친김에 라싸로 진입한 영국군은, 러시아에 원조 요청을 위해 몽골로 떠난 13대 달라이 라마가 없는 틈을 타 섭정과 강제 조약을 체결하고 티베트를 영국의 세력 범위에 둔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희박한 공기로 많은 군인들이 주둔할 수 없게 되자 일부만 남겨놓고 철수하면서 포탈라 궁을 비롯한 많은 사원의 보물들을 약탈한다. 이렇게 빼앗은 보물들은 4만여 마리의 나귀 등에 싣고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가오홍레이’의 저서 <절반의 중국사>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영국 데일리 뉴스 종군기자는 이렇게 폭로했다. ‘원정대가 사원을 약탈했다. 지나간 몇 주일 동안 자루에 담긴 전리품이 산간의 작은 길을 지나 끊임없이 인도로 운송되었다. 그 자루 속의 물건은 군관의 아내와 친구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산간 역사에는 약탈해온 골동품이 가득했으니....”
티베트 고원을 닮은 포탈라 궁
7세기 송첸감포는 라싸로 수도를 옮기고 산난 지역에 있는 티베트 최초의 궁인 융부라캉처럼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궁을 지었다. 천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7세기 중반, 선대왕들이 기거했던 궁을 중부 티베트 고원의 군주가 된 5대 달라이 라마는 현재의 포탈라 궁 모습으로 증축했으며, 그의 섭정이었던 셍게 갸초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한다. 지구 상에 우뚝 선 티베트 고원을 상징하듯, 티베트인의 자존심처럼 위엄 있는 거대한 조형물로 서 있다.
초르텐과 포탈라궁
포탈라궁과 사람들
포탈라 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 "갑시다! 그만", 4월의 라싸
궁의 후원 연못에서 바란본 포탈라궁, 10월
9시 30분 입장권이지만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도착한 포탈라궁Potala Palace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탓으로 하루 입장객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가이드 몐빠가 미리 구입해놓은 평소에는 5만원에 가까운 꽤 비싼 입장권이 4월 한정으로 무료이다. 전날 예매를 해야 하는 것이 좋으며 입장권에는 입장시간이 적혀있다.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렇지만 가방 검사와 티켓 및 여권 검사를 여러 번 하므로 가방은 가볍게, 여권은 꼭 필요하다.
궁의 입구, 시간이 정해져 있는 줄에 서있어도, 어리거나 늙었거나, 세련되거나 남루하거나간에 작은 공간만 있어도 사람들은 슬쩍 새치기를 시도한다. 내 앞에 슬며시 발 하나 들여놓은 아가씨,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마주쳐도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멀리 있는 친구를 부를 기세다. 몇 년 전, 처음 중국에 왔을 때만 해도 대놓고 새치기하는 것에 놀랐었는데, 바쁠때는 간혹 화가 나기도 하지만, 넓은 땅에서 태어난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려니 하고 생각해버린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있는 네모꼴의 전통적인 티베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117m 높이의 거대한 궁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경쾌함을 닮았다. 넓고 탄탄한 포도인, 양쪽에 있는 완만한 경사가 있는 진입로는 말을 타고 생활하는 티베트인들의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거니와 조형적으로도 날개를 펼친 것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건축이 양쪽으로 열려있는 이미지다.
호텔에 있던 포탈라궁 모형, 거의 흡사하다.
두꺼운 돌로 쌓은 기단 위에 나무와 흙을 사용해서 지었는데 두꺼운 벽과 리듬감 있는 작은 창들, 따뜻한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는 버드나무 가지를 촘촘하게 이용해 단열을 했다. 위로 117m라니, 탕!, 총소리를 듣고 달리고 달려도 끝이 안 나오던, 어릴 적 100m 달리기를 할 때를 생각하며 하얀색의 궁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14대 달라이 라마가 망원경으로 라싸 시내를 바라보던 그 옥상이 있을 것이었다.
양쪽에 있는 달라이 라마가 거주했던 생활공간과 행정업무를 관장했던 백궁과, 가운데 위치한 종교적 업무를 담당했던 홍궁으로 나뉜다. 홍궁은 궁 안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인 셈이다.
상부 쪽에 위치한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궁은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여러 번 나오는 곳으로 흡사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 궁의 교황이 거주하는 공간을 연상시킨다. 안으로 들어가면 달라이 라마의 처소는 빛으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유난히 어둡다.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던 겨울 왕궁의 작은 창가에, 오르골 연주를 좋아하던 한 아이처럼, 아침햇살이 살포시 앉아있다.
달라이 라마가 생활하는 곳과 광장
조캉사원
암도에서, 혹은 캄에서 왔을까, 걸어서 또는 오체투지를 하면서 많게는 수천 킬로미터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 중의 하나인 조캉 사원 앞에는 온종일 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군데군데 놓아둔 화분이 오체투지를 하는 분들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를 해준다.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햇빛을 받으며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을 보니, 커다란 나무라도 곳곳에 심어놓으면 좋겠다. 사이사이에는 9세기에 당과 토번 사이에 맺은 ‘우호를 유지하며 서로 침범하지 말자’는 약속이 새겨진 회맹 비 등 여러 비석들이 이곳이 역사적인 곳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은 포탈라궁과 함께 전통한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선남선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전통한복도 멋지고 예쁘지만 티베트 전통복식은 우리 것보다 화려함이 더하다.
조캉사원의 사슴과 법륜
조캉 사원 앞,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을 위해 화분을 놔 둔 것 같다.
조캉사원앞의 티베트 여인, 머리장식이 화려한 티베트 전통 복식
연기와 어둠에 묶여있다가, 조캉사원의 옥상에 올라오니 살 것 같다.
7세기(647년)에 세워진 목조건축물인 조캉사원은 호숫물을 빼고 지은 사원이다. 이곳은 티베트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송첸감포(581?~ 650)와 두 왕비, 네팔에서 온 브리쿠티 공주와 당나라에서 시집 온 문성공주(625~680)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사람들이 서있는 줄을 따라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어둠 속에서 촛불들이 누릿한 버터 향을 풍기며 타고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주전자에 녹인 야크 버터를 정성을 다해 공양한다. 버터향이 내는 연기와 향을 참아가며 어둠을 뚫고 송첸감포와 문성공주, 그녀가 가지고 온 석가모니 12세 등신 유금동상을 보기 위해 수많은 불상들까지 알현해야 한다.
7세기에 송첸감포 왕이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민중은 토착종교인 뵌교를 믿고 있었다. 80여 년이 지난 727년 경이돼서야 불교는 토착종교인 뵌교와의 융합을 거쳐 진정한 티베트 불교가 만들어졌으며 779년에는 첫 번째 불교사원인 쌍(쌈)예사가 세워졌다.
어떤 책을 읽어도 최초의 티베트 불교사원이란 수식은 쌍(쌈)예사 앞에만 붙는다. (이 부분에서 나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 훨씬 일찍 세워진 647년 라싸에 세워진 조캉사원이나 라모체 사원은 당시에는 불경과 불상에게 공양하는 사원 역할만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티베트 불교사원으로서의 조건이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숨을 내쉬듯 사원을 빠져나오면 시계방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걷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조캉사원을 둘러싼 팔각형 거리인 오래된 시장통 바코르를 도는 사람들이다.
원래 수미산(티베트에서는 강 린포체, 일반적으로 카일라스) 둘레를 도는 것을 ‘코라’라고 하는데 순례자들은 사원이나 성산 주위를 마니차를 돌리거나 오체투지를 하면서 돌기도 한다. 한국의 어느 지역이나 조성되어있는 둘레 길도 ‘코라’인 셈이다. 수미산 코라 108번을 마치면 성불한다고 하니 이것이 진실이라면 불교야말로 어떤 종교보다도 가장 평등하다.
티베트 향기가 물씬한 바코르거리
조캉사원앞에서 만난 커플, 야수처럼 달려드는 카메라에도 너그럽게 포즈를 취해주는 연인
짱양갸초와 MAKYE AME, 시절이 아름다운 그를 버렸다!
가이드 몐빠가 왼쪽으로 MAKYE AME라고 붙어있는 카페 한 곳을 가리킨다. 6대 달라이 라마인 짱양갸초1683-1708)가 자주 들렀던 카페라고 한다. MAKYE AME의 뜻은 순결한 소녀, 성결한 어머니란 뜻이라고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낭만적인 연애 시를 많이 쓴 6대 달라이 라마인 짱양 갸초가 궁금해 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었다. 14세인 1697년 6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으나 청나라와 티베트, 몽골 사이의 권력관계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짱양 갸초의 나이는 25(또는 24세)세에 불과했다. 20세 때는 사미계를 반납하고 속인의 신분이 되었으나 달라이 라마의 지위는 유지하였다.
그는 순수하고 용감하였으나 사랑 앞에서는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5대 달라이 라마의 오른팔이었던 셍게 갸초에 의해 키워진 청년 달라이 라마는 섭정의 강력한 권력에, 반항하고 번민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그의 시에 전해진다.
“짱양, 너무 방종하다라고 내게 말하지 말라.
당신이 즐거움을 원하는 것과 똑같이 나 역시도 안락을 원한다.“
그는 방종하였다고 전해지나 짧은 생애,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 그에게 방종할만한 시간이라도 있었을까, 그는 연인 런쩐융무仁珍翁姆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Makye Ame가 그녀를 지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페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시절이 아름다운 그를 버렸다!
6대 달라이 라마가 런쩐융무를 만나던 곳이었을까, 바코르 거리의 MAKYE AME카페
짱양 갸초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티베트 여인, 전통 복장이 너무 아름답다.
짱양 갸초는 많은 사랑노래를 남겼는데 간결하고 직관적이며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사랑과 달라이 라마이기에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뇌를 그렸다.
“스승의 존안을 가만히 생각하려 해도 나타나지 않네. 그러나 연인의 얼굴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속에 자꾸 떠오르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번 생에서는 법연을 끊어야 하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연인의 소망을 저버려야 하리.”
“하나는 모자를 머리에 쓰라 하고, 하나는 머리댕기를 등 뒤로 드리우라 하네, 하나는 내게 천천히 걸으라고 말하고, 하나는 걸음을 멈추라 하네. 하나는 힘들어하지 말라 하고, 하나는 곧 다시 만날 거라고 말하네.”
MAKYE AME카페는 고풍스러우며 채도가 낮은 주황빛 외관에 옥상이 갖추어져 있다. 라싸에는 이주한 한족들이 대부분의 상권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이곳에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그가 살았던 시절의 향기가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