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이들의 종교인 러시아 정교를 일정 부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 비해 매우 짧지만, 동북, 중앙아시아와 유럽은 물론 아나톨리아 고원(비잔틴)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야말로 광범위한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품고 있어 간단하지만은 않다. 특히 모스크바는 현재의 수도이며, 러시아의 두 통치 가문 중 첫 번째 통치가인 류리크 가문이 꽃을 피운 곳이며 막을 내린 곳이기도 하다.
류리크Rurik 그리고 키예프 공국
기원전에는 흑해 북부에 킴메르인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있고, 이어서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트인이 남부 러시아에 살았다. 기원후에는 중앙아시아에 넓게 분포한 튀르크와 그리스, 그리고 이란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문화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러시아 땅 최초의 본향은 862년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영역을 넓혀가던 노르만족(Варяги)인 류리크Rurik(재위862~879)가 세운 노브고로드Novgorod 공국이다. 류리크 왕조의 창시자인 그의 뒤를 이은 올레그Oleg는 드네프르 강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수도를 키예프Kiev로 옮겨, 882년경 사실상 러시아 최초의 나라라고 여겨지는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10세기를 전후한 당시 키예프는 백성은 자유롭고, 문화적으로 번영을 이뤘던 대도시였다. 올레그의 아들 이고리에 이어 어린 아들 스뱌토슬라프 시절에는 이고리의 아내인 올가가 섭정을 맡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 루시의 영역을 넓혀 비잔틴제국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류리크 가문은 혈족들에게 땅을 균등하게 분배했기에 키예프를 중심으로 당시 많은 공국이 존재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루시(루스인들이 사는 땅)라고 불렀으며(현재 벨라루스라는 국명에 루스라는 옛 표현이 남아있다), 이것은 러시아 국명의 기원이 되었다. 그중 키예프 공국(현재 우크라이나)은 루스를 대표했다.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공후
스뱌토슬라프의 아들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재위 980~1015)는 989년 그리스 정교를 가져와 키예프 대공국(러시아의 첫 국가)의 국교로 선포한 사람이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블라디미르는 최고신 페룬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믿던 주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이념이 필요했다. 키예프 루스는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면서 슬라브 민중들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다신교를 접목시킨, 범신론적인 러시아 정교를 탄생시켰다.
그의 요청으로 각 국에서 보낸 종교 사절단들이 키예프에 도착했다. 블라디미르는 나라가 없어 떠도는 이들이 믿는 유대교도, 감동이 없는 가톨릭도,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는 이슬람교도 아닌, 그리스 정교를 선택했다. 확인을 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의 예배의식을 보고 돌아온 사절단은, “그들의 의식은 지상인지 천상인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루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었다. 예배의식뿐인가, 정교회 건물이 가지고 있는 ‘아름답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미학적으로만 본다면 그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연대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백성들을 생각하는 공후 블라디미르를 따뜻하고 퍽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러시아에 그리스 정교를 들여왔지만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못할 것이 없는, 그는 늘 피비린내가 따라다니는 냉혈한이었다.
그것은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와의 밀고 당기는 고도의 정치적 협상으로 얻어진 결과였다. 비잔틴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는 급한 내란을 잠재우기 위해 키예프 대공인 블라디미르의 도움을 요청한다. 블라디미르가 내건 조건은 바실리우스 2세의 여동생인 안나 공주와의 결혼이었다. 그는 폴로츠크 공후의 딸 로그네다와 이미 혼인을 했으며, 그녀의 아버지와 가족을 죽이고 강제로 결혼한 것도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몸종이었던 그의 태생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결혼으로 정치적 정통성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란이 끝나자 바실리우스 2세에게 결혼 약속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기울어지긴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비잔틴제국이며 소위 동로마제국이 아닌가. 이교도이며, 작은 공국에 불과한 키예프 루시(러시아)의 대공과 비잔틴 제국 공주와의 결혼은 어불성설이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블라디미르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땅이었던 세바스토폴을 점령해버린다. 이로서 이루어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와 비잔틴 제국 공주와의 결혼은 그리스 정교가 루시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다.
<블라디미르와 로그네다> 1770, 안톤 로센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타타르의 멍에와 모스크바 공국
하지만 야로슬라브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죽고 난 1125년 이후 각 공국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으며 키예프 루시는 대공으로서의 위치를 점차 상실해갔다. 이러한 시점에 몽골의 움직임은 대륙의 서쪽으로 향했다. 호레즘의 통치자 무하마드 샤를 쫓던 수부타이(1176~1248)와 제베(1137~1223)의 몽골 추적대는 카스피해 부근에 숨어있던 무하마드를 처단하고 나서도 계속 서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1223년 아조프해로 연결된 칼카 강의 전투에서 몽골과 루시는 격돌했다. 몽골과의 공포스러운 첫 만남에서 루시는 이들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1236년 오고타이 칸의 명령을 받은 수부타이와 바투의 유럽 원정대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1237년 랴잔 공국과 수즈달 공국에 이어 1240년에는 키예프 루시까지 함락시켰다. 킵차크 칸국(1243~1502)이 세워지면서 루시는 소위 타타르의 멍에(1480년까지 타타르의 지배를 받은 240여 년간의 시기)가 시작된다. 타타르 치하에서 루시의 맹주 자리를 차지한 것은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공후이며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손자 유리 돌고루키가 1147년에 세운 도시로,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1263년경(혹은 1271년경) 건국한 모스크바 공국이었다. 1327년에는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였으며 여러 강들과 연결된 모스크바 강이 지나가는 무역로에 위치한 모스크바 공국은 점차 힘을 키워 강국으로 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스크바 공국의 성장의 발판은 킵차크 칸국(타타르)이었다.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은 각 공국의 공후들에게 통치를 허가하는 야르리크를 주었으며, 이들 중에서 입맛에 맞는 공후를 대공으로 임명하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1세(재위 1328~1340)는 세금과 공물만 제대로 내면 점령지의 정치나 종교에는 너그러웠던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대공 작위를 인정받으며 정치적 입지가 높아졌다. 그는 러시아 공국들의 공물과 세금을 모아서 킵차크 칸국에 상납하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돈주머니(칼리타)라는 별명이 말하듯 말하자면 삥땅으로 부를 축적하여, 전쟁보다는 돈놀이를 하여 공국들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국토를 넓혀간다. 블라디미르에 있는 대주교구까지 모스크바로 데려온 그는, 타타르 치하에서 모스크바 공국을 경제와 정치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킵차크 칸국(14세기에 전성기)은 티무르의 침략(1391년)과 잦은 내분으로 15세기에 이르러 여러 칸국들은 분리 독립했으며 이후 이반 대제라 부르는 이반 3세(재위 1462~1505)에 의해 1480년 킵차크 칸국의 권력은 거의 소멸된다.
타타르의 멍에는 러시아 땅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카잔의 상징 질란트와 카잔 크레믈안에 있는 이슬람 사원
성 게오르기 상과 쌍두 독수리
988년 키예프의 대공 블라디미르가 러시아 남쪽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스 정교와 함께 키릴 문자를 받아들여 종교를 통일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면, 모스크바의 바실리 2세(재위 1425~1462)는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을 받지 않는, 러시아 정교회로 분리 독립한다. 그의 아들 이반 3세는 1480년 킵차크 칸국과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러시아 법전 수제브니크를 편찬하여 농노제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수제브니크는 백성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빼앗기고 농노가 되었던 악법의 시작이었지만, 통치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노동력 위에 튼튼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44년간 재위하면서 모스크바 공국만이 아닌 러시아의 통치자로 거듭난다. 또한 그는 1472년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인 조에(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진정한 동로마의 후계자로 자처하여 황제 즉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표현인 짜르Tsar가 된다. 조에와 이반 3세 사이에서 태어난 바실리 3세가 후계가 되면서 명실공히 모스크바 대공국은 정교회의 수호국이며, 비잔틴 제국 계승 국의 정통성을 얻게 된다. 이때 모스크바의 상징인 성 게오르기 상과 합친 비잔틴의 쌍두 독수리 문장을 받아들인다.
성 게오르기가 있는 러시아 문장(왼쪽)과 성 게오르기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 게오르기(뒤러 작)와 라파엘이 그린 성 게오르기
조에와 이반 3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바실리 3세(재위 1505~1533)는 1526년 두 번째 결혼한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반 4세(1530~1584)의 탄생이 너무 기쁜 나머지 기념하여 1532년 Kolomenskoye에 예수 승천 교회를 세웠다.
이반 4세(1530~1584)는 1552년 카잔 칸국(1547~1552)을,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1544~1556)을 정복, 볼가강과 카스피해를 포함한 남부를 차지하고, 시비르 칸국(시베리아의 이름이 유래)을 점령하면서 점차 동부와 시베리아로 현재와 같은 영토를 넓혀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 아닌, 전 러시아 최초의 짜르로 대관식(17세)을 치른 통치자였으며 농노제를 강화하고 귀족들인 보야르의 세력을 약화시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강력한 짜르의 전제 권력을 만들었다. 말년에는 폭군으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지혜로운 아들을 죽여 결국은 류리크 왕조를 단절시켰지만, 그는 러시아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군주였다.
역사상 러시아를 통치한 두 가문 중 첫 번째 가문인 류리크 왕조의 736년간의 통치가 끝나고 1613년 두 번째 왕조이며 러시아 마지막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이콘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소비에트 시절을 제외하고는 러시아 정교와 같이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정교이며 정교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는 이콘이다.
이콘icon은 그리스어로 그림이나 형상을 의미한다. 이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는 십자가를 지고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채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는 ‘베로니카의 수건’ 이야기와 동방 정교회에서 많이 회자되는 ‘아브가르의 아마포’이다.
병에 걸려 고통 속을 헤매던 현 시리아 북쪽과 가까운 터키 동남부에 있는 오스로에네Osroene(수도 에데사Edessa, 병을 앓고 있던, 현재 터키 남부Sanliurfa, 당시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동쪽은 파르티아 남쪽과 서쪽으로는 로마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음)의 왕 아브가르(당시 왕을 지칭하는 용어로 봄)는 시리아 서남쪽 유대 땅에 산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부디 치유해주기를 청했다. 아브가르의 믿음에 응답하듯 다음에 방문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예수는 자신의 얼굴을 천에 찍어 보내주셨다고 한다. 오스로에네Osroene(기원전132~244)는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로마의 속국을 전전한 소국이었지만 수도인 에데사는 기독교 복음의 근거지로, 오스로에네Osroene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만딜리온Mandylion(천 위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은 약탈 전쟁으로 유명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사라졌다고 한다. 두 가지 에피소드에 서려있는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콘은 다른 이가 아닌 '예수 자신이 남긴 본인의 얼굴'이다.
성 베로니카의 천, 1400년 경 쾰른에서 제작, 목판/<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12세기 노브고로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콘은 5세기 서로마가 멸망하고 출현한 게르만족 국가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알려줄 도구로 발전하였으며, 비잔틴(동로마)에서 꽃을 피웠으나, 730년경부터 심각한 성화상 파괴 논쟁이 이어졌다. 787년 니케아 공의회와 843년 미카엘 3세의 섭정을 맡은 테오도라 황후는 콘스탄티노플 총회를 거쳐 성화상에 대한 공경(하나님께는 숭배Adoration, 성인이나 순교자 등에게는 공경Respect, veneration)으로 논쟁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성상 파괴 운동 박해를 피해 유능한 이콘 화가들이 이미 정교화가 된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수즈달, 모스크바 등의 루시(러시아) 땅으로 이주를 하면서 비잔틴의 전통적인 이콘 기술은 루시 땅으로 전해진다. 이콘은 비잔틴에서 발전한 모자이크 형식보다 루시의 숲에서 취한 나무판을 이용해 수도사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고졸하지만 단순하면서 화려한, 의미를 알고 보면 은근하면서 위엄이 있는 표정이 배어나는 그것은 예술이나 그림이기 이전에 신과 숭배자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였다.
12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건너온 블라디미르 성모는 티무르의 침략을 막아주었으며 특히 카잔의 성모는 1612년 폴란드의 침략과 1709년 스웨덴의 침략,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 같은 강대국들의 전쟁에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이들 이콘은 복제되고 또 복제되어 집안 제단에 모셔졌고 혹은 러시아인들의 운전석 앞에서 안전한 운전을 보장해 주었다.
블라디미르의 성모(왼쪽)와 카잔의 성모(오른쪽)
이콘은 매우 상징적이며 종교의식에서 매개가 되는 이미지로 본다면 불교의 탱화나 힌두교에서의 성화와 성격은 비슷하다.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집안 동쪽에 이콘을 모신 제단을 끄리스니 우골이라 부르며, 자동차에는 작은 이콘을 모시는 것처럼, 인도네시아의 발리나 인도에서 만난 힌두교인들은 직장이나 가정, 자동차에 시바나 가네쉬 같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들을 모신다. 티베트인들이 탱화를 소지하거나 모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다만 정교는 힌두에서 발전한 불교나 힌두처럼 다신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나, 성모와 크리스트 외에 수많은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은, 그것 또한 깊이 들여다보기 전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콘화는 점차 그리는 구도나 색채 등에서 일정한 기준을 만들어 일반적인 그림과는 구분이 되어 발전해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많은 혜택을 누렸던 정교회의 세력은 더욱 막강해짐과 동시에 이콘화는 더욱 발전하였다.
1497년경 제작,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왼쪽 그림)/ <삼위일체> 1420년대 , 루블료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수없이 많은 대상이 이콘으로 표현되지만 대표적인 이콘은 예수가 있는 이콘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콘은 성모 이콘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의미가 다른 성모 이콘만 볼 줄 알아도 이콘을 보는 재미가 생긴다.
블라디미르의 성모처럼 성모와 아기 예수가 뺨을 맞대고 있는 모습은 자비의 성모이며, 아기 예수를 안고 오른손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모습은 인도해 주는 성모이다. 성모가 두 손을 어깨까지 들고 아기 예수가 가슴에 있는 그림은 표징 또는 계시의 성모이고 아기 예수가 없이 두 손을 들고 있는 성모는 기도하는 성모이다. 이 중 인도해 주는 성모 유형에서 변형된 형태가 가장 많아 보였다.
왼쪽은 인도해 주는 성모 유형이며, 오른쪽은 블라디미르의 성모와 같은 자비의 성모 유형이다. 카잔 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