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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크레믈

# 러시아 - 모스크바 크레믈 이야기

by 그루

크레믈(크렘린)


모스크바 크레믈은 남쪽에 모스크바 강을 두고 북동쪽에는 붉은 광장을 끼고 있는 약간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의 성벽의 길이가 2.23Km인 성채이다. 12세기 도시를 처음 세운 유리 돌고루키가 모스크바 강변 보로비츠키 언덕에 목책으로 만든 성채를,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고귀한 의미를 가진 흰색 석벽으로 교체하였다. 15세기에 이반 3세는 타타르에 의해 훼손된 성채를 전통적인 흰색 성벽으로 복원하였으며 그에 의해서 많은 성당과 건축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17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대를 달리 한 건축물들이 들어섰고 소비에트 시절인 20세기까지 이어졌다. 모스크바 크레믈의 성벽은 이후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전통적인 흰색의 모스크바 성채가 보고 싶다면 모스크바의 동쪽에 위치한 카잔 크레믈을 보아야 한다.

이반 3세 시대 그대로인 카잔 크레믈의 성벽
강변에서 바라본 카잔 크레믈
바실리 성당과 오른쪽 크레믈 성벽과 망루

이반 4세는 카잔 칸국을 점령한 후, 원래 있던 타타르 성채 자리에 흰색 모스크바 크레믈을 닮은 카잔 크레믈을 만들었다. 소박하지만 믿음직한 전통적인 망루가 중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여전히 당시의 모습인 흰색의 카잔 크레믈 성채는 두 강이 만나는 공활한 볼가강변에서 더욱 아름답다. 이탈리아의 건축 장인들이 만든, 하늘 높이 올라선 뾰족한 망루들이 지키는 붉은빛 모스크바 크레믈의 성벽은 선입견인가, 완벽하지만 사뭇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크레믈 매표소는 Kremlin Museum이라고 영어로도 표기되어 있다. 입장권을 끊고(3가지의 입장권이 있으며 알렉산드로프 공원 쪽에서도 구입 가능하다) 왕관을 닮은 구타피야 망루Kutafiya에 있는 유리 건물에서 보안 검색을 받으면(짐이 없는 것이 좋다) 구타피야 망루와 연결된 트로이츠카야 망루를 통해 입장한다. 크레믈에 있는 20개의 망루 중 가장 높은 트로이츠카야(삼위일체) 망루는 1499년 완공되었다. 크레믈은 역사적인 곳이지만 현재도 대통령이 거주하며 집무를 보는 곳으로 여전히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정치 1번지이다. 그러므로 들어가면 일단 사람들이 다니는 동선을 따라야 한다. 가는 길 왼편으로 많은 대포들이 진열되어 있는 노란색 건물은 병기고Arsenal이다. 조국 전쟁 때 얻은 200년이 넘은 다양한 크기의 전리품들에는 윤기가 흐른다.

병기고Arsenal 외부에 진열되어 있는 나폴레옹군의 대포들


1812년 6월, 약속한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한 러시아를 혼내주기 위하여 나폴레옹은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군은 한 번의 큰 전투였던 모스크바 근교에서 벌어진 보로디노 전투 외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후퇴를 거듭하는 러시아 군을 따라 9월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매일 불타는 모스크바에서 견딜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약 한 달 후 폐허의 모스크바를 뒤로 하고 퇴각한다. 잘생긴 청동색 대포들은 이때 버리고 간 것들이다. 러시아 군인들은 끈질기게 일 년 이상 파리까지 퇴각하는 프랑스 군의 뒤를 쫓았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인들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고, 러시아를 조국이라고 느꼈으며 이 전쟁을 조국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민족의식이 고양되었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비롯하여 화가들과 작곡가들의 작품이 조국 전쟁을 배경으로 잇달아 창작되었다.


러시아 문장과 성 게오르기(Georgius, George)


역사적인 크레믈 안에 있는 사각형의 현대식 건물은 공식 이름은 국립 크렘린 대회 궁전으로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명으로 1961년 완공된 대형 회의장이다. 현재는 볼쇼이 극장의 별관으로 이곳에서 많은 공연이 이루어진다. 모스크바에 오기 전 7월 서울에서, 볼쇼이 극장의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들어갔더니 벌써 시즌 티켓은 끝나 버렸다. 막바지 공연 중인 다른 극장의 티켓을 구입하려고 인터넷으로 들어와 봤던 곳인데 발레 공연 좌석이 5,000 석 이상이다. 구입하기를 망설이다가, 발레를 이렇게 큰 극장에서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아 포기했던 곳이다.

국립 크렘린 대회 궁전, 소련시절의 대표적인 궁전이다. 입구 위에 러시아 문장이 붙어있다.


건물 중앙에 붙어 있는 황금색 쌍두 독수리와 가운데 성 게오르기(성 조지)가 있는 러시아 문장은 러시아를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데, 이 건물과는 꽤나 어색하다. 성 게오르기(Georgius, George)는 초기 기독교의 성인으로 전통적으로 모스크바의 수호성인이었다. 이콘에도 많이 등장하는 그는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성인 중 하나인데 카파도키아 혹은 리다(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에서 태어나(275년에서 281년 사이) 황제의 경비병으로 출세한 로마의 군인이었다. 297년 경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의 기독교 박해 때인 303년 경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슬람에서조차 존경하는 성 조지는 494년 교황 젤라시우스 1세 때 성인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존경받던 그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1세기 십자군들에 의해서였다. 4세기 팔레스타인의 로마 군인이었던 성 조지가 기독교인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 그들은 고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1118년 결성된 템플 기사단의 상징은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성 조지 십자가이다. 그는 영국의 잉글랜드와 제노바, 모스크바, 조지아 등에서의 수호신이며 성 조지 십자가는 유럽 극우자들의 심벌로 쓰이기도 한다.

성 게오르기는 주로 백마를 타고 창이나 칼로 을 죽이고 위험에 처한 미녀(공주)를 구하는 기사로 등장하는데 종교와 무관하게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이야기와 포맷은 같다. 기독교적 상징으로 보면 용은 악마요 이슬람이다. 게오르기가 구한 공주는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선량한 왕국인 셈이다. 성 게오르기(성 조지) 이미지는 유럽의 미술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제로 이콘은 물론이고, 근대와 현대 화가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놀랍게도 종교의 이미지는 시공을 초월한다.


쌍두 독수리 가운데 성 게오르기가 있는 러시아 문장(왼쪽)과 용을 물리치는 성 게오르기(오른쪽)

성당 광장


크레믈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은 성당 광장에 있는 성당들이다. 우스펜스키(성모승천 , 1479) 성당과 블라고베시첸스키(수태고지, 1489) 성당이 연이어 지어졌으며 아르한겔스키(대천사) 성당이 1508년에 들어섰다. 크레믈에 있는 15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반 3세를 비롯한 짜르들의 의뢰를 받은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 양식이 러시아 전통 건축양식과 함께 표현되었다.

우스펜스키(성모승천) 성당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우스펜스키 대성당, 왼쪽 뒤로는 작은 돔들이 있는 궁이 보이며 오른쪽으로 12사도 성당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피오라반티는 이반 3세의 명을 받아 블라디미르(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수도)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을 모델로 러시아 전통 건축을 살리고 르네상스 양식을 접목하여 우스펜스키 성당을 지었다. 그렇게 큰 건축물은 아닌데도 수직 감이 강조된 간결한 외관으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예수와 4대 복음서의 저자를 의미하는 5개의 꾸뽈(돔)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성당 내부에는 총대주교와 대주교들의 무덤이 있으며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들을 거행한 곳으로 특히 러시아 황제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다.

류리크 왕조의 대관식은 물론이고,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는 페테르부르크였지만 대관식만은 모스크바에 있는 이곳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거행하였다. 마지막으로 거행된 대관식은 1896년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의 대관식이었다. 그는 가정적이며 다정하고 뼛속까지 신사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황제였다. 하지만 다한 국운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국권수호에 안감 힘을 쓰던 대한제국에는 호의를 다했던-극동에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었지만-고마운 황제였다.

아팠던 시절 - 1896년 5월 26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광무황제(고종)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고자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민영환 윤치호, 러시아 공사관 스테인을 포함한 6명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상해, 나가사키, 요코하마, 밴쿠버, 뉴욕, 리버풀, 베를린을 거쳐 목적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동시에 횡단한 것이다. 이들은 모스크바의 대관식을 마치고 황제를 따라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러시아 인사들과의 교섭을 벌였다. 기록에 의하면 니콜라이 2세는 조선의 사절단에게 꽤 호의적이었던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공작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사절단은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0월에 귀국했다. 절체절명의 국운만 아니었다면 페테르부르크에서 한 달 반가량 체류하는 동안 근대 문물을 시찰하였으며 6개월 이상 다른 세계를 접하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대한 제국의 지도자들은 대한제국을 적지 않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통역관 김득련은 <환구일기> 등으로 이들의 여행을 기록했는데 민영환은 김득련의 기록에 살을 붙여 <해천추범>이라는 기행문을 남겼으며 윤치호는 영어일기로 당시를 기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한탄하며 자결한 민영환과, 너무나 할일이 많았던 대표 지식인이었던 윤치호의 말년의 매국행위는 아프고 씁쓸하다.

을사늑약 후 미국과 프랑스에 있던 대한제국의 외교공관은 사라졌으며 급기야 1904년 9월 일본은 당시 공사였던 이범준(1900년 7월 12일 페테르고프 궁에서 황제에게 신임장 전달) 공사를 면직시켰다. 주러시아 공관을 폐쇄시키고 공사를 소환하라는 일본의 다각적인 압력에도 러시아는 공사관을 유지시켰으며 이범준 공사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1905년 말까지 필요한 체류비를 국가에서 지불하도록 했다. 이범준 공사는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특사들을 참석할 수 있도록 주도하였다. 러시아 공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후 공관이 폐쇄되고 공사가 면직이 된 후에도 1910년 이범준 공사가 강제병합으로 인해 자살하기까지 연금 명목으로 이범준 공사의 체류비는 지급되었다고 한다.

한복을 입은 민영환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사절단도 1896년 5월 26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이 광장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러시아 사절단.jpg 1896년 니콜라스2세 대관식에 참석한 사절단 일행/앞줄 왼쪽부터 김득련, 윤치호, 민영환/ 뒷줄 왼쪽부터 손희영, 스타인, 김도일(윤치호의 일기를 번역한 책에서 사진 캡춰)

높지만 넓지 않은 우스펜스키 성당 내부의 천장과 벽은 물론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은 주로 동쪽에 위치한다)와 4 개의 원형 기둥에 빈틈없이 이콘들이 그려져 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공간에는 11세기 말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성 게오르기와 예수와 성모 외에 성서 속의 내용과 인물, 역사 속의 성인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그려진 귀한 이콘들이 소장되어 있다. 사이사이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꽃다발처럼 내려와 은은한 빛을 발한다. 많은 관람객으로 인해 떠밀려서 이동하는지라 하나하나 제대로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사방의 이콘 안에 있는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빛바랜 그림 속 그들의 눈빛과 몸짓이 나를 향한다.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수용하기에는 놀란 뇌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사진은 찍을 수 없으며, 그래도 찍는 사람이 있는데 몰래 찍는 사진이 제대로 나올리는 만무하다. 이반 대제가 제3의 로마라고 자부했던 모스크바에서, 1453년 사라진 천년 비잔틴 제국에서 구현했던 이콘이 21세기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수태고지 성당과 대천사 성당


블라가베셴스키(수태고지) 성당, 오른쪽으로 그라노비타 궁이 위치한다.


블라고베시첸스키(수태고지) 성당은 1489년 이반 3세가 만든 황실 가족의 예배당이며 황실의 결혼식이 거행됐던 곳이다. 기독교 일화에서 가장 많이 표현되는 것 중의 하나인 수태고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리는 시점을 표현한 것이다. 결혼과 잉태는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황금색 돔이 제일 많아 아기자기하고 우아해 보이는 성당은 돔이 얹어지는 드럼(기둥)에 당시 섬세했던 프스코프 건축 장인들의 특징이 남아있다.

아르한겔스키(대천사) 성당은 이반 1세가 1333년 세운 교회 자리에 이반 3세는 이탈리아 건축가 알레비시오 노비를 시켜 지었다. 이곳은 러시아 역대 대공들과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1508년 완공을 지켜본 이반 3세의 아들 바실리 3세는 모스크바 공국 공후들의 유골들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기독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과, 치유를 상징하는 라파엘 그리고 최후의 날에는 죄의 값을 달아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하며(저승에서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생전의 행위를 판정하는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와 같은 역할이다.) 또한 악마의 반란을 제압한 대천사이며 전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미카엘 대천사이다. 이곳은 러시아를 강력히 지켜 준 수호신 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쳐진 성당이다.

러시아 건축 기법이 두드러진 두 개의 다른 성당과는 달리 다락 벽을 장식한 가리비를 연상시키는 조개 문양과 아치 등에서 르네상스 양식 기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를 상징하는 가운데 황금색 돔이 유난히 크며 네 개의 은색 돔과의 높낮이의 대비도 크다.

기독교의 대천사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수태고지를 알리는 가브리엘, 전사의 이미지로 모스크바군의 수호신 미카엘, 치유의 대천사 라파엘이다.
아르한겔스키(대천사) 성당, 오른쪽으로 황금색 작은 돔들이 장식된 수태고지 성당이 보인다.

성 밖에서도 가장 높이 보이는 곳으로 성당 광장에서 가장 높은 이반 대제의 종루는 광장에 있는 성당들의 종루 역할을 하고 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타종되는데, 무려 스무 개가 넘는 종이 매달려 있다. 1508년 이반 3세(이반 대제) 때 이탈리아 건축가 본 프리야진이 만든 이후 여러 번 개축되고 복원되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80여 미터에 달하는 높은 종루를 올려다보니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한 장면에서 울렸던 이반 대제의 종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다시 울린다. 영화 속에서 울렸던 추억의 종소리는 생각보다 리드미컬하고 아름답다. 여행을 하면서 책이나 그림 또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도 내겐 소소한 즐거움이다.

가장 높은 흰색의 이반 대제 종루(오른쪽)


이반 대제(3세)의 종루 앞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종 하나가 한쪽이 깨져나가 있어 더욱 시선을 끄는지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황제의 종이라 부르는 종은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재위 1730~1740) 여제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표면에는 바로크식 화려한 장식이 들어오는데 여제의 모습도 새겨져 있다.


니콘 총대주교가 1656년 지은 비잔틴식 건축물인 총대주교 궁전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12 사도 성당 옆에는 표도르 1세(재위 1584~1598)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짜르의 대포가 서있다. 이반 4세가 사망한 후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권력도 없는 황제가 이런 화려한 대포를 만들었다니, 황제의 종과 더불어 이것 또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조물이다.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얼룩 또한 역사이다.


황제의 종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반복적으로 바쁘게 성당을 들락날락거렸다. 잠시 멈춰 광장을 한 번 둘러보니 3 개의 성당 주변으로 시간이 있다면 들어가 보면 좋을 만한 역사적인 궁전들이 언뜻언뜻 얼굴을 비친다. 크레믈 성채 안에는 크레믈 궁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궁전 아홉 개가 있다는데, 서너 시간에 불과한 한나절에 본 곳보다 못 본 곳이 더 많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후, 크레믈 안에서 다시 한번 걸을 수 있기를, 모스크바 강변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망루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성당에 대한 인상-황금색


러시아는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답게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하는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표현되는 색채는 중성 색인 흰색을 적절히 믹스해서 만든 밝고 부드러운 색채이다. 전통 목조 건축물과 정교회에 칠해진 다양한 파스텔 톤은 여름보다 겨울이 긴 시베리아의 도시들을 밝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별로 러시아 땅을 지키고 살아간 민족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좋아하는 색은 단연 황금색이다. 동아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시베리아의 도시 이르쿠츠크, 우랄산맥의 도시 예카테린부르크 그리고 카잔과 유럽에 속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박물관의 정교한 세공품은 물론이고 정교회의 둥근 지붕인 꾸뽈과 (남의 땅에서 들여온 금은보화로 치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 등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서조차 보지 못한) 금빛으로 채워진 찬란한 성당 내부, 그리고 이콘에 아낌없이 들어간 황금색이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황금은 스키타이와 사카Saka, 오손, 흉노Hun는 물론 선비, 몽골, 튀르크 등을 아우른 북방민족의 트레이드마크다. 사족이지만 신라의 내물 마립간부터 나타나는 돌무지 덧널무덤이나 황금 유물들은 유라시아의 유물과 관계를 말해주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교회의 금으로 장식한 성화벽. 크레믈에 있는 성당들에서 느낀 하나의 이미지는 황금색이었다. 세르기예프 파사드


고비사막과 시베리아까지 퍼져 있는 알타이 산맥의 ‘알타이’는 ‘금’을 뜻한다. 북방의 모피와 알타이 산맥에서 채취한 황금은 그리스의 발달한 금 세공품과 교환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의 수준 높은 황금 문명은 흑해와 맞닿아 있는 그리스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흑해와 드네프르 강의 중심지였던 키예프 루스 지역은 그리스와 북방민족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수준 높은 문명을 빨아들이는 창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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