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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름

# 러시아 –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대성당

by 그루

모스크바의 여름

지구에 있는 땅덩어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러시아를 가장 빠르게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는 단연 모스크바요, 그중에서도 크렘린(크레믈린)과 아름다운 붉은 광장이다. 모스크바 강변에서 시작된 중세 모스크바의 원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하루에 스치듯 지나갈 수 없는 그야말로 여러 날 다리품을 팔아야 할 거대 박물관이다.


이른 아침 숙소 근처의 러시아워로 분주한 벨라루스스까야 역에서 3역만 가면 볼쇼이 극장이 있는 찌아뜨랄나야 역(Театральная)이다. 붉은 광장과 크렘린이 가까운 아호뜨느이 랴트Охотный Ряд역이 있지만 볼쇼이(발쇼이로 발음해야 알아듣는다. 발쇼이는 크다 라는 뜻) 극장을 보기 위해 지하철 찌아뜨랄나야역에서 내렸다. 목적지인 크렘린과 붉은 광장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주변의 풍경도 볼 겸 걸어서 가기에도 멀지 않다.

지금은 관광객이 넘치는 모스크바의 여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은 휴업이다. 이때 무용수들은 주로 해외 순회공연을 다닌다. 러시아에 오기 전 서울에서, 발레를 보고 싶어 여기저기 뒤졌는데 볼쇼이는 이미 시즌 공연이 없고 크렘린 안에 있는 크렘린 극장의 발레 티켓이 남아있었다. 볼쇼이 극장의 부속 극장인 크렘린 극장은 티켓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싼 것이 좌석이 너무 많다. 사실 발레는 아담한 극장에서 보는 것이 감상하기에 좋다. 다행히 성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날, 발레 공연으로 유명한 극장의 표가 남아있어 후딱 예매를 해 놓았다.

모스크바의 8월 오전 9시 무렵, 볼쇼이 극장 앞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사람들.


러시아 100 루블 지폐에도 나와 있는 러시아의 자존심 볼쇼이는 러시아 국립 극장으로 음악은 물론 오페라와 발레의 요람으로 1776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56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8개의 흰색 기둥이 인상적이다. 극장의 오른쪽 뒤로 백화점 '쭘' 이 보이고 주변에는 말르이 극장 등 근대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맞은편 혁명광장의 작은 공원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한 칼 마르크스의 동상이 서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던 그는 여전히 계급 없는 사회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을까. 세상을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처럼, 투박한 돌덩어리에 갇혀있다.

잊고 있던 러시아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마르크스의 동상


붉은 광장, 끄라스나야 쁠로샤지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마네쥐 광장에서 두 개의 뾰족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부활의 문(끄라스나야 광장의 북쪽)을 들어서면 붉은(끄라스나야) 광장이다. 15세기 말에 조성되었으며 17세기부터 붉은 광장으로 불렀다. 끄라스나야는 아름다운이란 뜻으로 ‘붉은’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문 양쪽으로는 붉은 색의 국립 역사박물관과 조국 전쟁 박물관이 위치한다.

부활의 문 주변은 언제나 넘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딱 놀이공원의 입구 분위기다. 이곳은 대부분의 광장이 그렇듯이 원래 시장이었다. 정보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시장은 대부분의 고도에서 심장 역할을 하는데 이곳 역시 예나 지금이나 모스크바, 나아가 러시아의 심장 한복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칭형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붉은 벽돌 건물인 역사박물관 앞에서 남쪽 성 바실리 성당을 바라보면 오른쪽은 레닌 묘와 크렘린, 왼쪽은 카잔 성당과 국영 백화점 굼ГУМ 이 위치하여 길이가 약 695m, 폭이 약 100m가 넘는 긴네모꼴 광장을 만들어낸다.


역사박물관 앞에는 대조국 전쟁(2차 세계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승리를 견인한 러시아가 사랑하는 영웅 주코프Zhukov(1896~1974)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1945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곳에서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할 때 스탈린을 대신하여 사열을 받던 모습이라고 한다. 스탈린의 질시와 이후 정치적 지도자들에 의해 좌천을 거듭했지만,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소련 최고의 군인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주코프 장군은 1974년 크렘린에 있는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붉은 광장의 입구 부활의 문
역사박물관 앞 주코프Zhukov(1896~1974) 장군의 동상


성 바실리 대성당 St. Basil's Cathedral

9월 중순의 늦은 오후, 성 바실리 대성당을 바라보고 가면서. 오른쪽 크레믈 성벽 앞에서는 세계 군악대 페스티벌에 사용했던 시설들을 철거하고 있다.


광장 안에 섬처럼 홀연히 서 있는 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인 성 바실리 성당이다. 이반 4세는 오랜 숙원이었던 타타르 인들의 도시인 카잔 함락을 기념하여 건축가'이반 바르마Ivan Barma'와 '포스트니크 야코블레프Postnik Yakovlev'를 시켜 1555년경 시작한 공사는 1560년경 완공하였다. 크레믈 성 안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시장터에 있던 삼위일체 교회 자리에 기념비적인 교회를 세운 것이다.

성당을 향해 가면서 눈을 지그시 하고 바라보면 동화 속에 나오는 밀가루와 설탕을 반죽하여 만든 달달하고도 부드러운 케이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놀이동산이나 동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성들이 바실리 성당을 닮아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현재도 여전히 살아있는 테트리스 게임에 나오는 성의 이미지도 성 바실리 성당이다. 테트리스 게임은 1984년 소련 사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만들었으니 말이다.

광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은 홀린 듯이 모두 바실리 성당을 향해 걷는 것만 같다. 다가갈수록 설레고 들뜬다. 멀리서 봤을 때 거대해 보였던 성당은 다가갈수록 이상하리만치 위압감이 없다. 멋진 색깔로 멋을 낸 꾸뽈들은 어깨에 다양한 코코슈니크Kokoshnik로 장식한 것이 우아하고 발랄한 선남선녀들이 서 있는 것 같다. ‘코코슈니크’는 러시아 여성들의 전통 의상인 사라판Sarafan과 함께 머리위에 쓰는 모자나 티아라 형식의 우아한 아치형 장식으로, 15세기에서 16세기 무렵 러시아 전통 건축에서 창문이나 지붕 위, 특히 목조 주택을 장식할 때 코코슈니크 아치 형식이 많이 쓰였다. 러시아 건축에서 코코슈니크를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돔은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에서 발달한 지붕의 형태로 웅장해서 위압감이 먼저 오는 이들의 돔과는 달리 바실리 성당의 돔(꾸뽈)은 작은 히야신스 알뿌리처럼 위로는 길쭉한데 볼륨감이 극대화되어 우아함의 극치를 이룬다. 긴 겨울 폭설에 눈들이 미끄러져 쌓이지 못할 정도의 경사를 준 것이다. 돔에 칠해진 강렬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세련된 색의 대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에 이처럼 완벽할 수가 있을까.


성당의 정면인 북쪽, 앞에 있는 동상은 17세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침략에 맞써 싸워 민족을 구한 영웅인 미닌과 포자르스키, 사실 성당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바실리 성당은 비잔틴 건축이나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과 러시아에 유행하는 르네상스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세히 언뜻 보기에는 어떤 건축양식의 영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가까운 모델을 찾자면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왕가의 영지에 있는 콜로멘스코예 교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바실리 3세가 이반 4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1532년에 세운 콜로멘스코예Kolomenskoye 예수 승천 교회는 러시아 건축의 전통 방식대로 돌과 벽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만들었다. 바실리 성당의 계단으로 연결된 높은 하부구조와 가운데 천막 형 지붕을 한 성모 전구 교회는 뚜렷한 영향이 보인다. 이처럼 건축가는 러시아 땅에 퍼져있는 전통 양식을 거울삼아 장식성이 풍부한 목조건축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가 품고 있던 건축에 대한 이상과 신앙심이 만들어 준 꿈을 성 바실리 성당에 실현해 놓은 것이다.


교회는 계단이 있는 하나의 기단 위에 작은 9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각 교회는 좁은 복도로 이어져 있다. 47미터에 가까운 높은 첨탑이 있는 중앙의 교회를 중심으로 8개의 교회가 에워싸고 있는 성당은 위에서 보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이 각각 다른 꾸뽈(돔) 때문인지 대칭이 주는 긴장감은 없다. 교회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시간도 생각도 멈춰버린다. 돔 아래쪽에는 동판을 황금색 레이스처럼 빙 둘러 장식한 것이 정겹다. 러시아 민가의 많은 목조 건축물의 처마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장식이었는데 고귀한 성당의 처마에 둘러있다.


이반 4세의 아들인 표도르 이바노비치 재위시절인 27년 뒤인 1588년 성당 북동쪽에 10번째 작은 교회를 달아냈는데 성 바실리 교회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성당에 안장되어 있었던, 러시아 민중에게 존경받는 성 바실리(1469~1557)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현재의 바실리 대성당 모습이 완성이 되었다. 이후 대중들에게 원래의 이름인 삼위일체 성당이나 성모 전구 성당보다 성 바실리 성당으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바실리 대성당은 교회이기 이전에 박물관이다. 소련 시절인 1928년 박물관으로 지정된 이래 여전히 지금도 박물관이다. 다만 현대에 와서 사람들의 요청으로 특별한 날에는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성당 내부를 들어가려면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 러시아 등에 있는 대부분의 정교회를 방문하면 티켓을 구입하지 않고 긴치마나 스카프 정도의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들어가서 마음이 동하면 약간의 기부금을 내면 되지만, 교회라도 이미 박물관이면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긴 줄을 서서 1000 루블(한국 돈 약 17,000원 정도)에 티켓을 구입하고 내부를 들어가면 이콘을 비롯한 각종 유물들을 만나는데 이콘에 대한 지식이 얕으니 흥미도 적고 감동도 없다. 성 바실리 교회의 천정화에 그려진 천사 그림은 푸른색을 유난히 아름답게 표현한 샤갈의 그림이 오버랩된다. 다니다가 특별히 높은 천정이 나타나면 대성당의 가장 중앙에 있는 예배당이다. 대성당의 외관에도 꽃과 덩굴무늬의 패턴들이 그려져 있지만 교회 내부에 넓게 펼쳐진 이국적으로 보이는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러시아 전통 문양이라고 하는데, 이슬람에서 많이 표현하는 식물 패턴들이다 보니(240여 년간 러시아를 지배했던 킵차크 칸국을 비롯한 몽골과 튀르크 인들이 대부분인 타타르는 이슬람 문화이다)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타타르 문화와의 융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교회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찬양을 하는데 운이 좋다면 Doros라는 남성 아카펠라 중창단이 내는 천상의 연주를 들을 수도 있다.


성 바실리 대성당의 마지막 예배당인 바실리 교회의 천정화
대성당의 북쪽 출구에 그려진 덩굴식물 벽화. 이곳에서 내려가면 붉은 광장이 나온다.


좁은 통로를 지나 나타나는 작은 예배당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특별하고 흥미롭다. 각 교회마다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가 있어 아무리 작은 내부라도 각기 다른 하나의 교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 교회는 너무 좁아, 서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열 명 이상은 힘들 것 같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건축기술자인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3대 요소는 기능과 구조 그리고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이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우선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하면 3요소는 정삼각형을 이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 바실리 성당은 기능과 구조에서는 아름다움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성 바실리 대성당은 외관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 인간에게 감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예술품이 건축물이다.

성당 앞에는 멋진 구도를 한 동상이 서 있다. 바실리 성당과는 관계가 없으나 가짜 차르가 나타날 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기, 모스크바 크레믈은 1610년에서 1612년까지 이웃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 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상인 미닌과 공작 포자르스키의 국민군은 1612년 농노와 귀족, 카자크와 타타르 등 온 민족의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함으로써 사실상 로마노프 왕조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성당의 서쪽

점심을 먹고 오후에 크레믈(크레믈린)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바실리 대성당에서 서둘러 나왔지만 차마 떠나기가 아쉬워 교회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십여 일 후 리투아니아에서 모스크바에 다시 들어온 날, 벨라루스스까야 역 주변에 있는 호텔에 가방을 던져놓고 두 정거장만 가면 나오는 붉은 광장으로 향했었다. 온전히 성 바실리 성당만을 다시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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