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서 말하듯이 변산邊山의 대부분은 산으로 형성되어있다. 변산 아리랑이란 노래 가사처럼 변산에서는 이리 가도 산이요, 저리 가도 산이다. 다만 널리 알려진 채석강과 적벽강, 격포항 등이 있는 서쪽 해안선은 외변산外邊山이요, 반도의 대부분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안쪽의 산지는 내변산內邊山이라고 부르며,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한다. 시장이나 공공기관이 있는 부안군 시내는 내변산 안쪽(동북쪽) 내륙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위도를 가기 위해 변산 언저리를 기웃거렸는데, 해안에서 병풍처럼 보이며 높지 않음에도 장엄하기까지 한 빼어난 산그림은 내변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해도 변산에서 두 번씩이나 산을 오를 줄은 몰랐다.
내변산에서 직소폭포를 지나 관음봉을 오르고 새재 삼거리를 지나 내소사까지 넘어가는 루트를 다녀오기 전에는 변산에는 채석강과 바다만 있는 줄 알았다. 두어 달 후 어수대에서 청암마을로 넘어가는 쇠뿔봉 코스를 다녀오고 나서는 나는 홀로 꿈속에서도 해발 500m쯤 되는, 생각보다 험한 어딘지 모를 내변산의 바위산을 넘고 또 넘었다.
내변산 인장암
내변산을 다녀와서 이준익 감독의 작품 <변산>을 보았다. 변산을 어떻게 그렸는지 영화 속 ‘변산’의 이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는 ‘변산’에서 지명만 빌려왔을 뿐 정작 그곳의 이미지는 별로 없다. 영화 <변산>은 ‘변산’이 주인공이 아닌 이 시대의 청춘들이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산이라는 고향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강력하게 영화를 끌어가는 변산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있긴 하다. 영화의 인트로에서 노을은 희망을 잃은 청춘을 상징하지만, 앤딩에서의 노을은 희망을 상징한다. 노을! 그러나 변산에만 아름다운 노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쇠뿔봉
내변산 관음봉 코스를 올랐을 때보다 훨씬 짧은 코스이기도 했지만, 변산의 지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올랐던 산행이다. 하늘은 가을날처럼 높았던 3월 초, 한적한 길가에 널찍한 공간이 있는 부안군 상서면 유동 쉼터에 주차를 했다. 딱히 주차장은 아닌데 휴게소 느낌의 공터였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주차가 가능한지, 주차비를 내야 하는지 물어볼 텐데 아무도 없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텅 빈 공간에서 개 한 마리가 짖어댄다.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듯 쉼터를 빠져나왔다.
유동 쉼터와 뒤로 보이는 암릉으로 형성된 등산로
유동 쉼터 오른쪽 길로 나오면 어수대 방향 이정표가 서 있다. 어수대는 부안댐 발원지라고 한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쇠뿔봉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온다. 들머리 앞쪽으로 한 무리의 등반객이 산을 오른다. 반가웠다. 산을 오를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심이 된다. 정확한 루트로 가고 있는지 굳이 확인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평일에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이곳은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답게 안내표시도 잘 되어 있다. 코스가 단순하여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앞서가는 날렵한 등반객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니 평소보다 속도가 빨라진다. 10시 30분경 산행을 시작하여 20여 분 오르막길을 오르면 우슬(牛膝) 재가 나오고 왼쪽으로 조금 오르니 시야가 트인다. 내변산의 봉우리들은 대체로 400m에서 500m 정도의 해발고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암벽으로 이루어져 만만한 곳은 하나도 없다. 겉으로는 둥글둥글해 보여도 어떤 곳에서는 우악스럽게 힘을 자랑하는 엄청난 크기의 응회암 덩어리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나마 쇠뿔봉까지 가는 등산로의 중간중간에는 폭신한 길이 나타난다.
등산로가 23년 만에 재개방된 것은 비교적 근래이다. 2011년 경이라고 들었는데 그전까지 쇠뿔봉 코스는 지역민들의 생활 구역이었겠다. 그래서인지 산행코스에는 유난히 묘가 자주 나타난다. 등반을 시작한 지 약 두 시간 가까이 다가오면 쇠뿔봉이 나올만한 풍경이 시작되고 안전 펜스가 설치된 고래등 바위가 나타난다. 고래등 바위 너머로 동쇠뿔바위가 눈을 사로잡는다. 소의 뿔은 두 개인데, 나머지 하나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서쇠뿔봉이다. 오뚝한 동쇠뿔봉보다 넓어 보이는 전망대에 오르니 앞섰던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는다. 제법 거리를 두고 인사를 나누니 부안에 사시는 분들이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내변산에서 제일 높은 의상봉, 투구봉과 지장봉, 소의 무릎에 해당하는 우슬牛膝재까지, 쇠뿔봉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신다. 김제, 정읍까지 연결된 평야를 바라보면서 동학 이야기를 해 주니, 진솔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을 사랑하는 주민이 진정한 그 지역의 문화해설사이다. 내친김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저곳이 어디냐며 우금산(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을 가리키니 백제 부흥군과 우금 산성 이야기를 들려준다.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하나같이 자신의 고장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헤어지면서 꼭 추천해줄 만한 곳이라며 개암사와 우금산을 가보라고 한다.
동쇠뿔봉, 멀리 특별히 돌출된 곳이 우금산이다.
서 쇠뿔봉 전망대에서 급경사로 이루어진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근육질의 바위산은 본색을 드러낸다. 의상봉을 바라보며 지장봉까지 그야말로 기어서 내려왔다. 아무리 기어서 내려왔어도 내려오고 나면 성취감은 만땅이다. 평이한 육산보다 바위산을 더 선호하는 것을 보면 나의 내면에는 아찔함을 즐기는 유전자가 있나 보다.
지장봉
청림마을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쇠뿔봉
청림마을 쪽으로 내려오면 거리는 약 5.5km에 달하며 청림마을에 내려와서 쇠뿔바위봉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던 시간이 오후 2시 전후였으니 서너 번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약 3시간 30분 걸렸다. 단순하지만 난이도가 꽤 높은 곳도 있어 등산의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청림마을에서 주차를 한 유동 쉼터까지는 약 4km로 도보로는 약 30분에서 40분 거리이다.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지나가는 트럭 한 대가 멈춰 선다. “유동 쉼터까지 가는 버스가 언제 오나요?” 물었더니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곳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했거든요.” 하니 “허허, 거기가 우리 집이요, 타세요!” 하면서 선뜻 문을 열어준다.
민망하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염치 불고하고 탈 수밖에 없었다. 손이 부끄럽게 차비는 거절하셨다. 얼추 배낭을 만져봐도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거푸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를 뒤져서 음료수를 갖다 드리는 것 외에는 고마움을 표 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날은 산행의 시작도, 마지막도 유동 쉼터였다. 부안 상서면 유동 쉼터의 나른하지만 따뜻했던 오후를, 봄날의 높은 하늘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내소사로 향했다.
관음봉과 내소사
약 삼 개월 전에 직소폭포, 재백이 삼거리를 지나 관음봉에 올랐다. 새재를 지나 가마소 방향으로 내려가 내변산탐방지원센터로 원점 회귀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산 구간인 새재 삼거리에서 가마소 구간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입산금지 구역이었다. 내변산은 산이 복잡하고 깊으며 그러므로 겨울철에는 당연히 입산 금지 구간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들머리에는 입산금지 등산로를 알려주는 안내문이 있었을 텐데, 그것마저 지나친 것이다. 계획했던 거리보다 훨씬 긴 거리를 가야 하며, 내려간들 그곳은 차가 주차된 곳과는 정반대인 지역이다. 머리를 굴려봐야 뾰족한 수가 없어 벤치에 맥없이 앉아있으니 산악회 버스로 온 등산객 수십 명이 우리 앞을 달리듯 정신없이 지쳐간다.
아름다운 직소보 옆길
직소폭포 부근, 절리가 발달한 내변산 응회암
“왜 이렇게 빨리 가냐?”라고 물었더니 내소사 일주문에 버스가 서 있는데 네 시까지 못 내려가면 버스가 그냥 가버린다고 한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인데 다칠까 봐 걱정이 앞섰다. 그 와중에도 한 분은 인증 샷을 찍어야 한다며 촬영까지 부탁한다. 그러고 나서는 거의 뛰어 내려간다. 내게는 이상하리만치 보이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산악회 회원들이지만 친구처럼 다니는 한두 팀을 제외하고는 수십 명이 각자 온 것처럼 보였다. 거의 남자인데 여자도 한 명 보였다.
할 수 없이 내소사 방향으로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 산행을 한 덕에 지쳐서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쳐도, 700살이 넘었다는 할아버지 당산 느티나무가 곁을 스쳐도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만 가끔 지나칠 뿐 겨울날 내소사의 오후는 을씨년스러웠다.
말 붙일 사람이 필요해서 음식점 앞에서 해물전을 열심히 부치고 있는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했는데 새재 삼거리에서 입산 금지로 가마소 방향으로 못 내려가고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택시를 타고 싶은데 혹시 불러줄 수 있나요?” 말하기가 무섭게 아주머니는 잠깐 들어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택시를 알아보신다. 남쪽 줄포에서 영업하던 택시를 불러주었다. 기다리는 동안 해물파전과 막걸리를 구입했다. 숙소에서 먹을 거라고 했더니 남은 밥이라고 거절하지 말라며 밥과 반찬까지 얹어주신다. 아주머니는 서울에서 공무원을 하시다가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고향 생활이 매우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나지막하지만 단단하며 노래하듯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건강한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산행으로 지친 몸에 활기를 주었다. 다음에 내소사에 오면 꼭 찾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헤어졌다.
그녀의 친절을 마음에 담았지만, 그때는 인사말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삼 개월 후 이렇게 빨리 내소사에 다시 올 줄은 몰랐다. 그날의 고마움을 전하며 내소사 어귀에 있는 그녀와 자매들이 운영하는 식탁에서 한 끼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 숲은 내소사의 크고 작은 건축과 보수를 위해 조성한 숲이다.
내소사 꽃살문을 찍기 위해 아주 오래전 겨울날 눈 덮인 전나무 숲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이른 봄날의 전나무 숲은 겨울철 눈빛에 더욱 빛났던 푸르름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듬성듬성 이가 빠진 듯 수십 그루의 전나무들이 잘려 나갔으며 어떤 것은 쓰러진 채로 누워있다. 뿌리가 얕은 전나무들이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었다. 쓰러진 나무 주위에는 새들이 집을 짓고 사는지 곤줄박이들이 유난히 많다. 600m에 달하는 전나무 숲길을 지나니,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벚나무 길에는 봄을 알리는 분홍빛 물이 올랐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수령 1000년이 되었다는 할머니 당산(느티나무)이 내소사 마당을 반이나 점령하고 있다. 대부분 종교는 토속신앙과 종교가 합쳐진 복합 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곳에는 토속신앙의 상징인 당산나무가 절 집안에 아예 들어와 있다.
봉래루를 통과하면 보이는 풍경이다. 대웅보전이란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
크기가 다른 주춧돌 위에 서 있는, 빛바랜 나무색이 아름다운 누각 봉래루 옆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절집에서 만나는 이런 누각은 휑한 공간이 많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아래층은 기둥을 한껏 세워서 사람이 다니는 공간을 만들었다. 위층은 대체로 칸막이가 없는 하나의 공간이다.
봉래루를 통과하면 대웅보전이 나타나고 그 뒤로 관음봉이 후광처럼 서 있다. 대웅보전치고는 작은, 17세기 조선 중기에 지어진 정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알록달록한 단청이 시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투명하리만큼 퇴색한 그 모습은 다가설수록 우아한 아우라를 발한다. 부디 이처럼 화려한 서까래와 공포에서 떠나버린 색깔들이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 ‘대웅보전’이란 글씨는 남도에서 주로 많이 볼 수 있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현판이다. 이광사가 완성한 조선 고유의 동국진체는 16년간(죽을 때까지)의 유배지였던 완도 신지도에서 완성된 것이다. 묵직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강건한 그의 글씨가 나를 곧추세운다.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마주쳤던 내소사 꽃살문은 어린 시절 내가 종이꽃을 접어서 오려 붙인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꽃살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창살에 붙어있는 꽃들이 살아있는 화석처럼 보였다. 순간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이 눈으로 천천히 그것들을 타고 넘었다. 그냥 상상이지만, 내 손짓이 다가갈 때 붉거나, 희거나, 노랗거나, 각각의 꽃들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내소사의 꽃살문의 한 부분
내소사는 633년 무왕 34년에 혜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의 언급은 어쩔 수 없이 멀리 가 있던 생각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무武왕은 이름에서 보이듯이 41년 재위 기간에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한 왕이다. 미륵 불국토를 원했던 그의 치세에 백제 땅에 다수의 절집들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흔히 알고 있는 ‘서동’이다.
단청마저도 날아가 버린 대웅보전 때문일까, 내소사는 과하거나 넘쳐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없다. 종교가 인간에게 안기는 두려움은 기본인데, 나지막한 담장과, 축대를 쌓은 돌마저 둥글둥글하여 들어오는 이들을 편안하게 맞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