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투아니아 - 빌뉴스
샤울라이역에서 남동쪽으로 약 두 시간 후 빌뉴스 중앙역에 도착했다. 옆에 있는 빌뉴스 버스터미널에서 내일 방문할 예정인 트라카이 행 티켓을 끊었다. 구시가지의 빛바랜 주황빛 지붕 때문인가, 도시가 안겨주는 밝은 느낌에 발걸음마저 가볍다. 매일 지나다녔던 길처럼 약 900미터 거리 Gėlių street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Iron Wolf의 도시
어느 날 게디미나스 Gediminas 대공(1275~1341)은 빌니아 강과 네리스강이 만나는 숲에서 사냥을 마치고 잠이 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그는 꿈속에서 거대한 철로 만들어진(또는 철갑을 입은) 늑대가 언덕 꼭대기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꿈을 꾸었다. 게디미나스는 사제(토착 다신교) 리즈데이카 Lizdeika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사제는 철 늑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이자 통치자들의 거처가 될 땅을 의미한다는 해몽을 내놓았다. 게디미나스는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빌니아Vilnia 강의 이름을 따 빌뉴스라고 불렀다.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게디미나스의 꿈 아이언 울프 Iron Wolf의 이야기는 묘하게 로마의 건국신화를 연상시킨다. 굳이 연결하자면 1세기 로마 네로황제의 탄압을 피해 피신한 팔레온 가문이 네무나스 강을 통해 들어와 리투아니아를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빌뉴스 대성당 뒤 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 궁 앞에는 게디미나스 동상이 서 있다. 게디미나스는 말 앞에 서 있는 형상으로 흔하지 않은 자세이다. 게디미나스 왼쪽 아래에는 빌뉴스의 수호신처럼 아이언 울프가 울부짖고 있다. 철갑을 두른 아이언 울프는 강한 리투아니아를 상징하며 실제로 리투아니아 군(기계화 보병 여단)의 마스코트로 사용된다.
1323년 게디미나스 Gediminas 리투아니아 대공이 건설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옛 건축물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게디미나스 언덕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빌뉴스의 스카이라인은 몽글몽글한 주황색 지붕 일색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보면 크고 작은 주황색 꽃이 만발한 정원처럼 보인다. 빌뉴스 풍경으로만 보면 상처 없이 비교적 굴곡이 적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 루테니아, 독일인은 물론이고 러시아인과 유대인, 타타르인까지 오랜 시간 이웃하며 벽을 맞대고 살아왔던 곳이다. 토속신앙부터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 유대교와 이슬람교까지 이들이 신봉하던 종교는 너무나 다양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은 토속신앙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이다.
빌리안 바로크 Vilnian Baroque
빌뉴스에 인종과 종교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넓지 않은 빌뉴스 구시가지에는 20여 개의 교회 건물이 즐비하다. 이곳에서는 고딕양식을 비롯하여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와 비잔틴까지 시대를 수놓았던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건축역사의 현장이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바로크 양식은 리투아니아만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으로 발전했다. 후세인들은 빌뉴스의 이름을 따 빌리안 바로크 Vilnian Baroque라고 불렀다. 빌뉴스를 중심으로 학교와 교회, 수도원들이 빌리안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빌뉴스에서 최초로 건축한 빌리안 바로크식 건축물은 성 카시미르 교회 St Casimir’s Church(1604~1618, Jan Frankiewicz)이다. 카시미르 교회는 리투아니아 대공(1440~1492)이자 폴란드의 위대한 카시미르 대왕 Casimir IV(재위 1447~1492)의 둘째 아들인 성 카시미르에게 헌정되었다. 교회는 이탈리아 최초의 바로크 교회인 예수회 교단의 The Church of the Gesù(1568~1584) 교회를 참고하여 건축했다. 교회의 정면(파사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필라스터(붙임기둥)로 강조한 수직선이다. 1층은 6쌍의 필라스터로 장식하였다. 2층은 4쌍의 필라스터와 두 개의 중심 필라스터로 1층과 연결되어 보이며 중심 필라스터는 3층 필라스터와 연결되어 있다. 많게는 3단계까지 중첩시킨 얇은 붙임기둥은 입체적이다. 안정감이 있는 로마의 ‘일 제수 교회’보다 돋보이는 수직선은 육중한 건축물에 통일감을 주며 종교적 상승감을 고양시킨다. 코니스(처마)와 벽의 요철을 따라 이어진 수평 라인 장식에서 오는 웨이브는 리듬감을 더한다. 건물의 외벽은 밝은 파스텔 톤의 색으로 마감했다. 파사드 뒤에는 왕관이 올려져 있는 계단식 랜턴 큐폴라가 있다. 내부 제단은 화려한 문양이 살아있는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기둥 여러 개를 사용하였다. 바로크의 원래 특징인 역동감이 제단에서 느껴진다.
빌뉴스 구시가지에 있는 빌리안 바로크 건축물들은 파사드의 장식이 카시미르 교회보다 간결하거나 화려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요한 크리스토프 글라우비츠ohann Christoph Glaubitz의 설계로 지은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는 바실리안문은 처마에 각도가 큰 웨이브를 사용하였다. 빌뉴스 대학과 함께 있는 성 요한 교회(1388~1426)는 파사드를 필라스터와 함께 기둥과 동상으로 장식하여 역동성을 더하였다. 빌리안 바로크 양식으로 파사드를 장식하였지만 내부는 섬세하고 화려한 로코코 풍의 스투코로 마감한 교회들도 볼 수 있다.
빌뉴스에 빌리안 바로크식 건축물이 발달한 시기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이 루블린 조약(1569~1795)으로 연방이 된 이후와 겹친다. 14세기에 이미 두 나라는 동군연합으로 외적의 침략에 공동 대응을 하고 있던 차였다. (1386년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와 폴란드의 어린 여왕 야드비가가 결혼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독일계 튜턴기사단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혼인을 통한 동군연합으로 힘을 합쳤다.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초대 왕이 되었다.) 이 시기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전성기였으며 당시에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국이었다. - 1795년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게 강제 분할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 완전히 한 나라가 된 국민들의 자유로운 이주와 통혼이 이루어졌다.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은 빌뉴스로 이주하여 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확장시켰다. 국제도시로 성장한 빌뉴스에는 아름다운 가톨릭 교회가 많이 세워졌다. 빌뉴스의 밝고 따뜻한 이미지는 이 시기에 세운 도시에 즐비한 빌리안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의 영향이 크다. 건축은 한 지역 특정한 시기의 부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지표이다.
구시가지 입구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기인 16세기 초에 지어진 성문이 있다. 새벽의 문 Gate of Dawn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문은 빌뉴스 성을 이루던 문 중에 남아있는 유일한 문이다. 성문 위에는 리투아니아 국장인 비티스(흰색 말을 탄 기사)가 있고 그 아래를 자세히 보면 작은 두상 하나가 보인다. 몸통은 사라졌지만 머리에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상인들과 여행자의 신인 헤르메스이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였다. 새벽의 문을 두세 번은 드나들었으니 헤르메스 덕에 편안한 여행을 다녀왔나 보다. 새벽의 문을 들어서면 성문 위에 작은 교회가 있다. 교회 지붕 아래 삼각형 박공에는 섭리의 눈이 있다. 2층에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자비의 성모 성화가 순례자들을 맞는다. 성모의 얼굴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야기에우어 왕조 지그문트 2세 Sigismund II Augustus(1548~1572)의 왕비 바르바라 라지비우 Barbara Radziwiłł(1520~1551)를 모델로 해서 그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지그문트 2세와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러브스토리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이야기이다. 왕비가 된 후 5개월 만에 사망한 그녀의 죽음에 왕의 어머니 보나 스포르자 Bona Sforza의 힘이 작용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왕비의 시신은 빌뉴스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문을 들어서면 어디부터 봐야 할지 혼동이 올 만큼 시선을 끄는 곳이 많다. 성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1650년 건축한 성 테레사 교회가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Ulrich와 Constantino Tencalla가 디자인한 카르멜수도회 교회이다. 스웨덴에서 가져온 사암과 검정과 흰색의 대리석 그리고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다른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재건과 복원을 반복하였다.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혼재하며 밝고 단정하다. 성 카시미르 교회처럼 수직선이 강조되어 있는 차분한 느낌의 외부 장식과는 달리 내부는 바로크와 로코코 스타일을 배합하여 한껏 장식하였다. 천장의 프레스코화를 둘러싼 핑크 색이 벽체로 이어져 내려앉은 전체 색조는 누구나 종교적 감성으로 물들기에 충분하다.
성 테레사 교회에서 내려오다가 왼쪽을 보면 노란색의 유려한 바실리안 문이 보인다. 문 안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와 수도원은 빌뉴스의 유명 건축가인 요한 크리스토프 글라우비츠ohann Christoph Glaubitz의 설계로 지었다.
빌뉴스에는 러시아 통치 시절이 길었던 탓에 러시아정교회가 많으며 그것들은 여전히 도시의 요지에 앉아있다. 정교회는 십자가의 모양이 다르고 파사드에는 이콘이 그려져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없으며(대부분 서서 예배를 드린다) 제단은 이콘으로 가득 찬 성화벽(Iconostasis)으로 가려져 있다. 벤치가 없으니 내부는 더욱 화려하고 공간은 종교적 신비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작은 교회를 만들기에도 수월하여 러시아나 그리스처럼 정교회를 신봉하는 나라에는 두 세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 보이는 작고 귀여운 예배당이 많다. 파사드에 3명의 성인 이콘이 그려져 있는 성령의 정교회 Orthodox church of holy spirit 내부는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로코코 스타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고딕식 외관을 하고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 Church of St Nicolas도 보인다.
Ragutis의 집과 성 파라스케바 교회
그중에서도 성 파라스케바 교회 Church of St. Paraskeva는 역사적으로 주목할만한 교회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이 한창이던 1705년 러시아는 빌뉴스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피터대제(1672~1725)는 러시아의 완전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성 파라스케바 교회를 방문하였다. 유난히 눈이 반짝이는 9살가량의 흑인 소년과 함께였다. 에티오피아 혹은 에리트레야에서 오스만 군에 끌려온 것으로 알려진 소년은 전장에서 피터대제의 눈에 띄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소년은 이곳에서 정교회식 침례를 받았다. 피터대제는 기꺼이 마음이 자꾸 가는 소년 한니발 Gannibal(=Hannibal)의 대부가 되었다. 피터대제 밑에서 성장한 한니발 Abram Petrovich Gannibal(1696년 경~1781)은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장군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 충성을 다하는 한 가문의 시조이며 알렉산더 푸쉬킨의 증조할아버지이다. 3년 후인 1708년, 대북방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피터대제는 정복한 스웨덴 국기를 가지고 이곳을 한 번 더 방문한다. 러시아인에게는 피터대제의 정확한 행보가 남아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이곳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정신적 성지이다. 교회는 평지보다 높은 단 위에 세워져 있다. 계단 여섯 개를 올라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꽤 넓은 평지는 예사롭지가 않다. 이곳은 원래 리투아니아의 토속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교회가 있기 전 이곳에는 Ragutis를 위한 제단이 있었다. Ragutis는 리투아니아 맥주의 신이다. 라구티스 제단 앞 돌에는 구멍이 나 있으며 제사를 지낼 때 이 구멍에 성수, 혹은 맥주를 가득 채웠으리라고 추정한다. 라구티엔느 Ragutiene는 라구티스의 배우자이며, 라우고 에마파티스 Raugo Žemėpatis는 발효의 신이다. 세 명의 신은 그야말로 삼위일체가 아닌가, 특히 라우고 에마파티스는 반죽과 발효를 돕는 모든 종류의 음식에 관여하는 완벽한 신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관장하는 신들을 위한 신전이 빌뉴스의 중심에 있었다. 신전을 중심으로 수확의 기쁨을 누리던 떠들썩한 옛사람들의 축제를 상상해 본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특별한 곳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성 안나 교회이다. 빌리아 강변 우주피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는 Vytautas 리투아니아 대공의 부인 안나를 위해 1501년 목조교회로 처음 지어졌다. 성 안나교회(1495~1500)는 후기 고딕 양식의 하나인 플랑부아양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플랑부아양(Flamboyant) 스타일(1400~1550)에서는 건물의 규모와 골격이 확연히 작아지면서 섬세한 장식이 많아진다. 개보수를 했지만 교회의 외관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이다. 빌뉴스에서 성 안나 교회를 본 나폴레옹이 말했다는 ‘손바닥에 얹어 파리로 가지고 가고 싶다’라는 이야기가 수긍될 정도로 작고 예쁜 교회이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할 때 빌뉴스, 비텝스크, 스몰렌스크를 지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성 안나 교회와 한 몸처럼 서 있는 건물은 성 프란시스교회, 베르나딘 교회와 수도원이다.
교회 옆에는 아담 미츠키에비치 Adam Bernard Mickiewicz(1798~1855) 동상이 근심을 떠안은 모습으로 서 있다. 빌뉴스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에서 추앙받는 민족 시인이다.
마르구티스와 Užupis의 천사
날도 화창한 봄날, 해마다 부활절 주일이 지난 월요일은 직원 중의 한 두 명은 부활절 달걀을 가지고 와서 나눠주었다. 책상 위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달걀이 두세 개는 꼭 올라와 있곤 했다. 이날의 기억은 종교 유무를 떠나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빌뉴스 숙소 근처 모퉁이에 있는 Pylimo street의 자투리 광장에 부활절 달걀(마르구티스) 조각품이 서있다. 마르구티스Margutis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달걀인 Easter Egg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한 방법으로 부활주일 전날 알록달록 장식한 Easter Egg를 집안이나 정원에 숨겨놓고 보물찾기 하듯이 아이들에게 찾게 하였다. 숨겨진 부활절 달걀을 찾아다니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영화와 게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영화와 게임 안에 어릴 적 찾아다니던 이스터에그를 떠올리며 그들의 의도를 숨겨놓았다. 이들이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는 어릴 적 추억처럼 놀랍거나 즐거운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영화 속에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를 찾는 재미를 느껴볼 일이다.
군더더기 없는 달걀 모양은 가장 완벽한 형태 중의 하나이다. 달걀모양은 시대를 막론하고 탄생과 부활, 봄을 상징하며 때로는 여성과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중의적 표현을 갖기도 하는 달걀모양의 조각 작품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 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숭배한 모신 이스타르 여신의 상징인 달걀모양은 시간이 흘러 고대 소아시아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의 상징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10년 경부터 브랑쿠지가 제작한 달걀 형태 작품은 모던함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Margutis는 Romas Vilčiauskas의 작품이다. 2001년 마을의 부흥을 바라며 우주피스 Užupis에 세웠다. Romas Vilčiauskas와 Algirdas Umbrasas는 충분한 돈을 모아 계획한 작품이 완료되면 이 자리에 천사상을 세울 예정이었다. 즉 자리보전을 위해 임시로 Margutis 상을 세운 셈이다. 2002년에 천사상이 완성되었을 때 주민들은 그동안 정들었던 거대한 알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주민들의 바람대로 Easter Egg는 우주피스에서 멀지 않은 필리모 거리 작은 광장으로 옮겨졌다. 2003년 Lijana Turskytė는 터전을 옮긴 Margutis의 몸에 멋진 그림을 그려 넣었다. 마치 부활을 상징하듯 새로운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새로 만든 천사상은 마르구티스가 있던 자리 우주피스 마을의 중심지에 자리 잡았다.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빌니아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우주피스 공화국이라고도 부른다. 유대인들이 사라진 황폐화된 마을에 예술가들이 터를 잡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Romas Vilčiauskas와 Algirdas Umbrasas는 우주피스 공화국의 탄생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처럼 높이 8.5미터의 기둥 위에 놋쇠와 청동으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지닌 천사상을 만들었다.
헤이즐넛 올빼미 Hazelnut owl
라즈디누 펠례다Lazdynu Peleda는 수녀 복장과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는 등신상보다 훨씬 큰 두 여자의 거대한 동상이다.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단순화와 왜곡을 통해 여성의 강인한 이미지를 부각했다. 세계 어디를 다녀도 성모마리아와 테레사 수녀 외에는 여성이 동상의 주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공히 우리는 기원전부터 이어져온 가부장적인 사회에 살기 때문이다.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새벽의 문과 가까워 자주 마주쳤다. 동상을 돌면서 찬찬히 그녀들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수녀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두 여인의 모습은 가톨릭 수녀라고 하기엔 개성이 넘쳤다. 자꾸 눈에 밟히는 그녀들의 정체를 찾아보니 그들은 리투아니아 작가 Lazdynu Peleda였다.
Lazdynu Peleda는 이들의 필명으로 헤이즐넛 올빼미 Hazelnut owl란 뜻이다. 특별한 분위기의 위트가 넘치는 헤이즐넛 올빼미란 필명은 번역가 СЕРГЕЙ에 의하면 두 사람이 달밤에 산책하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매력이 넘치는 멋진 필명이다.
여성과 도시 생활의 삶을 주제로 공동 작업을 했던 자매 Sofia(1867~1926)와 Maria(1872~1957)는 19세기 후반에 명성을 떨쳤으며 그들의 박물관은 1966년에 세워졌다. 1993년에는 빌뉴스에 그들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국에 이들의 작품이 나와 있는 것은 없지만 СЕРГЕЙ가 번역한 언니 소피아의 작품 '엄마가 데려갔어요(Motule pavilojo)'라는 단편소설을 찾아 읽었다. 혹시나 스포일러가 될까 봐 허락을 받기 위해 작가를 찾았으나 СЕРГЕЙ님은 휴면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단숨에 읽어버린 이 작품에는 동화와 소설사이를 넘나드는 감성과 슬픔이 담담하게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