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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21. 2023

타박타박, 옛길을 걷는 즐거움

# 리투아니아 - Trakai


리투아니아에는 넓지 않은 국토에 2,800여 개의 호수가 있다. 트라카이를 방문하기 전에는 리투아니아가 호수의 나라인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빌뉴스 기차역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가면 트라카이행 버스를 탈 수 있다. 빌뉴스에 도착하면서 시간도 확인할 겸 터미널을 방문해서 예매를 했다. 물론 기차로도 갈 수 있지만 버스의 운행 횟수가 많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당일 발권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트라카이는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28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트라카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트라카이 안내도가 서 있다.  

    

옛트라카이 중심가
루카 호수/트라카이 안내도

트라카이는 세 개의 큰 호수(루카, 갈베, 타타르)에 둘러싸여 있다. 도시 입구에 있는 작은 호수 두 개까지 합하면 다섯 개다. 1321년 경 게디미나스(1275경~1341)는 리투아니아 공국의 수도 케르나베 Kernavė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호수 주변 숲의 나무를 잘라낸 자리에 성 Trakai Peninsula Castle을 지었다.(Trakai의 어원인 리투아니아어 trakas는 ‘glade’를 의미한다) 트라카이는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게디미나스가 수도로 자리를 잡은 곳을 지금은 세니에지 Senieji 트라카이(옛 트라카이)라고 부른다. 호수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트라카이 성 Trakai Island Castle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게디미나스의 아들 켕스투티스 Kęstutis(1300경~1382)의 통치 시기는 튜턴기사단 Teutonic Knights의 급습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독일계 튜턴기사단의 거침없는 침략은 켕스투티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튜턴기사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성채가 필요했다. 1362년 그는 옛 트라카이에서 보이는 갈베 Galvė호수에 있는 섬에 자신이 거 하는 성을 짓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다. 아름다운 갈베 호수는 수심이 깊어(가장 깊은 곳은 46.7m) 방어요새로는 최적이었다. 1377년 튜턴기사단의 공격으로 성의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건물은 보수와 동시에 옆으로 확장되었다. 바로 켕스투티스가 건설하기 시작한 트라카이성Trakai Island Castle이다.    

  

튜턴기사단의 끊임없는 요구는 리투아니아의 개종이었다. 수 백 년간의 전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1386년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켕스투티스의 이복형)는 발트 토속신앙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의 어린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와 재물에 눈이 먼 튜턴기사단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이교도의 땅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북방십자군이 이미 대부분 정복한 상태였다. 그들은 리투아니아도 어렵지 않게 정복하리라고 생각했다. 잔인하고 용의주도하기로 이름난 북방십자군(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튜턴기사단)에게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는 유능한 지도자인 켕스투티스가 있었다. 튜턴기사단이 습격만 하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늙은 통치자 켕스투티스는 기사단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들은 기어이 리투아니아 왕실 내부의 적을 이용해서 노련한 노장 켕스투티스를 해치웠다. 전장에서 평생을 바친 켕스투티스의 행적을 따라가노라면 하루라도 편하게 눈을 감고 잠을 잘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는 튜턴기사단을 물리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친 지도자였다. 부전자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아들 비타우타스 Vytautas(1350~1430) 대공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리투아니아공국을 당대 최대 강국으로 만들었다. 비타우타스는 옛트라카이성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Trakai Island Castle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치세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은 발트해에서 흑해(우크라이나)까지 다다랐다. 그러므로 켕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를 사랑하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아름다운 트라카이성Trakai Island Castle은 리투아니아의 옛 영화를 반추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니에지 트라카이에 있는 옛 성은 켕스투티스의 죽음 이후 1391년 튜턴 기사단의 공격에 파괴되었다. 성의 일부는 세니에지 트라카이에 남아있다.  

   

외성(왼쪽)으로 들어오면 꽤 넓은 뜰이 나온다. 오른쪽에 보이는 곳이 방어 요새인 내성 / 내성과 안뜰
외성과 내성 사이에 있는 해자(참호 역할)는 배가 다니는 수로가 되기도 한다.

1430년, 끊임없는 전쟁 중에도 성은 비타우타스 Vytautas에 의해 무사히 완공되었다. 남쪽에는 성에서 가장 높은 방어용 요새인 동시에 주거공간이 있는 35미터의 궁을 건축했다. 내성과  외성사이에는 이동이 자유로운 문이 설치되었으며 적의 침략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공작 궁의 외벽에는 각층을 연결하는 나무 회랑을 만들었다.

석재는 건물의 아랫부분과 중간은 물론 때로는 상부까지 사용되었으며 나머지는 전체적으로 붉은색의 벽돌을 사용하였다. 가까이에서 본 성은 벽돌로 지은 성이라기보다는 돌로 지은 돌성에 가까웠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양식이 차용되었다. 당시에는 갈베호의 수면이 지금보다 몇 미터나 높았으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공작궁을 비롯한 각 처로 이동이 가능했다. 이처럼 호수는 참호이자 천혜의 해자역할을 담당했다. 지금도 자연을 이용한 해자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당시를 상상하게 해 준다. 리투아니아는 끝까지 튜턴기사단을 비롯한 북방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국가로 남았으며 이들의 지치지 않는 강인함은 튜턴기사단의 몰락을 가져왔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410년 7월 15일 잘기리스 Žalgiris(폴란드에서는 Grunwald) 전투에서 튜턴기사단을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기사단의 수뇌부는 궤멸되었으며 튜턴기사단은 더 이상 회생하지 못했다. 비타우타스는 이 성에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7일 동안 연회를 개최했다. 이로써 이교도를 개종시킨다는 목적으로 발트를 침략했던 북방기사단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였다. 


Trakai Island Castle은 17세기에 일어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방과 모스크바 대공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리투아니아 정부의 노력으로 Trakai Island Castle은 15세기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Trakai Island Castle


트라카이 버스 터미널에서 트라카이 성까지는 2.3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시골길이다. 도보로 30여분이면 충분한 길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리며 걷다 보니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트라카이 성까지 운행되는 버스와 빌려주는 자전거도 있지만 나이를 먹은 목조 주택들을 바라보며 타박타박 오래된 옛길을 걷는 즐거움이 있다. 중심 도로 왼쪽으로는 타타르 Totoriškių 호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루카 Bernardinų호수가 있다.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에 타타르 호수가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립카 타타르인과 카라임 유대인

     

비타우타스 대공 시절에 리투아니아의 영역은 발트에서 흑해까지 다다랐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의 동쪽에 있는 킵차크 칸국 토크타미쉬 칸과 가까웠다. 당시 동유럽의 초원과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토크타미쉬Tokhtamysh(? ~ 1406년) 칸은 1395년 테레크 강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망명하였다.(1409년 토크타미쉬는 킵차크 칸국의 재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백장 칸국의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서 리투아니아로 들어온 타타르인들과 그 후손들을 립카 타타르 Lipka Tatar라고 불렀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전투에 능한 기마 전사들이 대부분이었던 립카 타타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에서 귀족계급에 속했으며 부유했다. 일부는 비타우타스의 개인 호위병이 되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트라카이에서 살았다. 립카 타타르는 튜턴기사단을 상대로 리투아니아가 대승을 거둔 잘기리스(1410) 전투에도 참전하여 승리에 큰 공헌을 하였다. 빌뉴스와 트라카이, 민스크 등에는 토토류 루키스케스 Totoriu Lukiskes라고 부르는 립카 타타르인들에게 할당된 구역이 지금도 남아있다. 트라카이를 상징하는 커다란 세 개의  호수 중에서 한 호수의 이름에 리투아니아어로 타타르 호수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타타르인들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립카 타타르인들은 1792년 리투아니아 폴란드 분할로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리투아니아에 충성을 다하였다. 이후 역사의 흐름을 따라서 일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 러시아, 리투아니아 등에서 점차 동화되었다. 폴란드와 벨라루스, 리투아니아의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도 립카 타타르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타타르 호수
타타르인과 리투아니아, 러시아, 카라임 유대인이 모여 살았던 마을/ 창문이 3 개인 카라임 주택

립카 타타르인과 더불어 비타우타스 대공이 데려온 민족은 카라임(Karaims 또는 Qara'im)이다. 이들은 유대교를 믿는 튀르크계인 하자르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크림 반도에서 노예무역과 장사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비타우타스의 초청을 받아 리투아니아로 이주하였다. 카라임 유대인은 말을 타고 흑해에서 발트해를 오가며 각지에 퍼져있는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하여 장사를 했으며 대규모의 낙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비타우타스는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길 쪽으로 창이 세 개 나있는 일자형 주택은 카라임 유대인의 주택이다. 창문 세 개는 하느님비타우타스, 그리고 가족을 의미한다. 비타우타스는 이민족인 카라임에게조차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들의 주택은 카라임 유대인이 많이 사는 카라이무 거리가 아니더라도 트라카이 거리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황색에 가까운 성의 붉은 고깔지붕은 풍성한 구름 아래서 더욱 아름답다. 두 개의 섬을 연결하는 나무다리 하나를 건너면 비타우타스 대공이 방문자를 맞이한다. 트라카이 성 Trakai Island Castle은 'ㄴ'자 모양의 외성과 방어요새로서의 탁월한 구조를 지닌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이 외성까지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내성으로 접근하기에는 꽤 어려워 보인다. 내성으로 어렵게 들어간다고 해도 내성의 안뜰에 갇혀버릴 수도 있는 구조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살았던 내부에 들어가면 켕스투티스와 아들 비타우타스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날 수 있다.


켕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 성에 들어가기 전 작은 섬에 서 있는 비타우타스 조각상

Trakai Island Castle을 빠져나오니 호수 주변의 레스토랑에는 Kibinai가 그려져 있다. 키비나이는 립카 타타르인들과 카라임 유대인들이 즐겨 먹던 음식으로 지금은 트라카이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길쭉한 대형만두를 튀긴 모양인데 안에는 다진 고기와 양파 등이 들어있다.

      

키비나이와 레스토랑

트라카이 성을 떠나기가 아쉬워 요트를 타고 20여 개의 섬이 점점이 떠 있는 갈베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성은 어느 방향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멀리 흰색의 우아한 티슈키에비츠 궁전 Tyszkiewicz palace이 보인다.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대표적인 귀족인 티슈키에비츠의 궁은 리투아니아는 물론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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