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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16. 2023

빛나는 도시 '샤울라이'

# 리투아니아 - 샤울라이, 십자가 언덕

 

샤울레이행 기차를 기다리며 /클라이페다

이른 아침 6시 30분 발 샤울라이행 기차를 탔다. 클라이페다에서 샤울라이까지 2시간 13분이 소요됐다. 캐리어를 샤울라이 역 짐보관소에 맡기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빌뉴스행 12시 50분발 기차를 예매했기 때문에 오후 12시 30분 전에는 기차역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음이 바쁘니 택시를 부르거나 잡는 것도 시간낭비다. 지도를 보면서 왼쪽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10분 정도 걸려 오전 9시경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도만타이 Domantai 십자가 언덕 가는 시간을 물으니 프린트한 시간표를 내어준다. 평균 한 시간에 한 대씩 운행하는 버스는 이미 떠난 상태이다. 버스를 타도 20~30여분 허허벌판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마음속으로는 택시가 우선순위였다. 


택시는 한적한 교외를 달린다. 도만타이 십자가 언덕까지는 북쪽으로 12킬로미터가 넘는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공간의 낮은 둔덕에 수많은 십자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택시기사에게 30분을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살짝 올린 입꼬리와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언덕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십자가 언덕'


샤울라이는 저항의 도시이자 승리의 도시이다.'Siauliai' 또는 'Saule'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태양을 의미한다. 샤울라이가 이름 그대로 ‘빛나는 도시’가 된 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Saule 전투를 통해서이다. 

      

1236년 9월 22일, 이날은 독일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이교도(사모기티아인과 세미갈리안)와의 전투가 샤울라이 벌판에서 벌어졌다. Saule 전쟁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기사단장 Volkwin을 비롯하여 많은 기사들이 사망했다. 13세기 초 발트 땅에 성서와 함께 침략의 칼을 들고 들어온 기사단이 경험한 최초의 대패였다. 추스를 힘도 남아있지 않은 기사단은 1237년 튜턴 기사단에 합병되었다. 이로써 이교도의 땅 발트를 개종시키고자 들어온 가톨릭 독일 기사단으로 튜턴기사단과 쌍벽을 이루던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세력은 한 풀 꺾였다. 리투아니아인들에게 Saule 전투에서의 승리는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침략자에 맞서 승리를 거둔 벌판에 튜턴 기사단의 습격에 대비해서 방어 요새를 만들었다. 샤울라이 시는 전투가 발발한 1236년 9월 22일을 도시의 창립일로 지정하여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더하여 2,000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9월 22일을 발트 통일의 날로 선포한 것을 보면 이들에게 Saule 전투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410년, 리투아니아는 그룬발트 Grunwald 전투에서 튜턴기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유럽의 마지막 남은 이교도의 땅 리투아니아를 개종시키려는 목적으로 침략한 튜턴기사단의 잔인함은 리투아니아인들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기나긴 침략의 역사를 썼지만 리투아니아를 정복하지 못했다. 중세사에서 대규모의 전쟁으로 기록된 그룬발트 전투로 다시는 리투아니아를 침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튜턴 기사단의 몰락을 재촉했다. 기사단의 패배로 리투아니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샤울라이 주변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점차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가 많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는 달리 리투아니아에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 신실하다는 것은 주일날 많은 교회가 비어있는 서유럽의 가톨릭국가들과는 달리 주일날 교회로 향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단은 칼로 침략하여 원주민들을 농노로 만들어 착취하고 귀족이 되어 자손 대대로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은 땅에서 쫓겨났지만, 이교도를 개종시키겠다는 한 가지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인류가 기대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는 긍정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를 고양시켰으며 역사를 변화시켰고 문명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나 권력과 재물과 밀착한 두 얼굴을 가진 종교의 권태로움은 낯부끄럽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얼굴에 동산만 한 배를 내놓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신전 앞에 앉아있는 힌두교 브라만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성경((마태, 마르코, 루가복음)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성직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욱 어려워 보인다. 

           

1791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인 포니아토프스키 Stanislaw Ii August Poniatowski(재위 1764~95)는 샤울라이 시에 문장(사모기티아의 상징인 곰, 섭리의 눈, 포니아토프스키가문의 상징인 붉은 황소)을 부여했다. 현재 샤울라이는 리투아니아 제4의 도시이며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샤울라이 문장

    


십자가 언덕은 14세기 경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숫자의 십자가들이 언덕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795년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이후부터이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터지자, 이에 영향을 받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러시아의 탄압에 항거하여 1831년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1세는 더욱 가혹한 탄압과 통치로 맞섰다. 결국 1863년에는 또다시 1월 혁명이 폴란드 리투아니아에서 발발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 역시 대규모 봉기에 무력으로 진압했다. 러시아의 강제 진압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으며 시신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무덤대신 희생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염원을 담은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만 9,000여 개가 넘는 십자가가 세워졌다. 1944년에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소련은 종교를 불허했다. 종교 탄압은 공식적인 행위였으며 십자가 언덕은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다. 그래도 이어지는 추모행렬을 막기 위하여 소련은 불도저로-1963년과 1973년을 포함하여 적어도 3번-이 언덕을 밀어버렸다. 그럴수록 민중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라 십자가 언덕은 신앙심과 국가를 위한 저항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1991년 독립 후 자유를 되찾은 십자가 언덕에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하였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십자가 언덕은 발트인을 넘아 세계인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봉헌한 십자가를 지나면 언덕 양편으로는 빽빽한 십자가 숲이다. 천천히 돌며 이름도 모르는 십자가 하나하나에 애써 눈길을 보냈다. 하늘을 배경으로 걸려있는 묵주에는 누군가의 염원이 걸려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봉헌한 십자가


기다려준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니 하품부터 찾아온다. 버스터미널 안에서 늦은 아침으로 리투아니아의 국민 햄버거 Hesburger를 먹었다. 햄버거 하나에 우리 돈 3,500원 정도의 가격이다. 빌뉴스를 가기 위해 샤울라이 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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