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칠레, 네루다와 아옌데의 도시 '산티아고'
2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아타카마에서 산티아고까지. 저녁 7시 30 분발 산티아고행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에 도착, 치킨 반 마리로 저녁을 대신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나마 밤 시간에 자고 가면 다음 날 저녁에 도착하니 나름 나은 선택일 것이다. 맨 뒷자리, 거기에다가 버스는 가격이 꽤 나가는, 어느 정도 좌석을 누일 수 있는‘세미카마’다.
칠레는 버스에서 코 베어 가는 곳
맨 뒷자리, 산티아고에 대한 기대와 흡족한 마음으로 한 시간쯤 갔을까, 버스가 잠시 정차하고 빈자리에 승객들을 싣는다. 복도를 가릴 만큼 몸집이 큰 여자가 들어오더니, 자기 좌석 인양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표를 보잔다. 여인의 큰 몸집으로 인해 우리의 시야는 가려졌고 표를 보여주는 3초 사이 선반 위에 올려놓은 앞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의 작은 배낭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큰 몸집의 여인은 뒷좌석의 우리의 눈을 가렸고 2인조 중 한 사람인 다른 남자가 순식간에 배낭을 갖고 달아난 것이다.
운동선수처럼 건강해 보이던 앞좌석의 사람이 내 배낭! 외치며 바로 뒤따라 달려 나갔지만 이미 배낭은 사라져 버린 뒤, 눈앞에서 코 베어 간다 더니, 내 앞에서 바로 이런 일을 목격한 것은 세상에 태어나 칠레에서 처음이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잠을 놓쳐 버렸지만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 자야지, 큰 짐이야 트렁크에 있지만 가지고 올라온 작은 가방과 카메라 가방을 체인으로 꽁꽁 묶어 놓고 잠을 청했다. 인도를 제외하고 여행을 하는 동안 짐을 묶기 위해 체인을 사용한 것은 칠레에서 처음이다. 인도에서 기차를 탈 때마다 짐을 체인으로 기둥에 묶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몸과 연결하여 불안해하며 잠을 청했던 기억이 스쳐간다.
때가 되니 승무원이 밥을 준다. 밥값이 포함이 되어 있겠지만 장시간 운행하는 남미 대부분의 버스에서는 밥을 준다. 무엇이든지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시간은 호기심에 흥분이 앞선다. 늘 배고픈 여행자에게 그것이 먹을 것이라면 더욱 흥분하지 않겠는가. 아르헨티나까지 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시간에는 관심사가 차내 식이 되어 버렸다. 칠레는 물론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등급이 높은 버스 티켓은 비행기 값과 비슷하다. 당연히 등급에 따라 서비스의 수준도 높아져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 버금가는 서비스를 받게 된다.
수첩을 보니 오늘은 8월 6일 토요일이다. 늦은 오후 산티아고 터미널에 도착,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이 되어 있는 센트로에 있는 호텔에 들어갔다. 오래된 호텔이지만 제법 깨끗하다. 호텔 앞 왼쪽에는 산 프란시스코 교회가 보이고 바로 앞에는 칠레대학교가 보인다. 칠레대학교 담벼락에는 정치적인 구호가 적혀있다. “아. 이곳은 아옌데 Salvador Allende(1908~1973)와 피노체트 Pinochet(1915~2006)의 나라.”
아옌데는 칠레 최초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대통령으로 사회주의적인 개혁정치가 못마땅한 미국의 힘을 뒤에 업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저항하다가 대통령궁 Palacio de la Moneda에서 자신의 총으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일 포스티노와 네루다
1994년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에는 칠레의 정치적 상황이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네루다와 우체부인 마리오의 우정을 바탕으로 작은 섬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그린 영화다.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1904~1973)는 1952년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의 한 작은 섬으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에게 전해지는 세계 각지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우체부 마리오가 고용된다. 마시모 트레이시가 분한 마리오는 네루다를 통해 '사랑'과 '시'를 알아가는, 다시 봐도 또 보고 싶은 내 추억 속의 영화이다.
사무치도록 평화롭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이탈리아의 프로치타 섬, "시는 은유야"라고 말했던 '네루다', 나도 그 곳에 가서 '네루다'를 만나고 싶다.
산티아고에서의 밤은 아름답다.
산티아고 지도를 보니 숙소가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어 동선이 참 편할 듯하다. 아우마다 거리 쪽으로 돌아가니 전자제품이나 카메라를 파는 곳이 눈에 들어온다. 관심이 없지만 윈도우로 들여다보니 한국 제품이 이것저것 쉽게 띈다. 하지만 관심 밖의 물건이고 습관처럼 과일가게부터 찾았다.
어두운 도심에서 과일가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마켓의 뒷부분으로 들어가니 빵과 치즈, 칠레의 다양한 와인 등이 먹음직스러운 과일들과 풍성하게 쌓여 있다. 먹거리로만 삶의 질을 따진다면 라틴 아메리카의 질은 단연 앞선다. 다양한 식료품들과 먹거리의 순수함, 품질도 우수하지만 가격 또한 참으로 착하다.
늘 움직이는 여행자들은 가볍게 사는 방법을 생활화해야만 한다. 다니다 보면 늘 배고프지만 지나친 식욕은 여행자의 목적을 의심하게 만들고, 지나친 쇼핑은 여행자의 탐욕스러운 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여행자는 비어 있어야 하며 무거운 것은 곧 여행을 포기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질이 좋은 와인을 싼 가격에 마실 수 있는 칠레에서라면, 와인 한 병에 과일과 치즈만 있어도 산티아고에서의 훌륭한 만찬이 될 것이다. 산티아고에서의 밤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