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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히 Feb 18. 2021

나의 '다름'을 '발견' 하는 것

혼자 일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의 '다름'을 알고 , 나는 나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는 것.

나의 '다름'을 알고 , 나는 나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는 것.

나는 늘 그랬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항상 책 모퉁이에 끄적끄적되는 것을 좋아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기억하는 사건보다 주변에서 말해줘서 기억으로 자리 잡은 사건들이 많았다. 엄마의 기억을 신뢰해본다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게 분명하고, 잔머리가 뛰어났다고 한다.

하나의 일화를 말해보면, 엄마는 어릴 적 책을 읽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했더니 나는 돈을 먼저 주면 책을 읽을게 라고 잔머리를 굴렸다고 한다. 엄마는 이년 봐라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잔머리가 뛰어났다. 내 기억엔 구몬과 빨간펜 학습지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전화기 밑에 정답지를 숨겨둔 걸 보았고, 나는 늘 엄마 없는 틈을 타 정답지에서 답을 찾아 채웠다. 유치원까지는 놀이터에서 거주한 기억이 많았고

그 외에는 뚜렷한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미술과 체육, 예체능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학년이 늘어갈수록 나는 점점 반대표로 체육대회/ 미술대회의 상을 휩쓸고 다녔고 (동네에서만 ) , 중학교를 들어가자 체육보다는 미술의 조금 더 흥미와 두각을 나타냈다.

 음악도 중간에 관심을 갖고 음악학원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음악학원만 가면 난 매를 맞고 돌아왔다. 처음 다닌 피아노 학원에선 바이엘을 들어가는 그 시점 건반을 치던 나에게 선생님은 계란이 꺠졌다며 모나미 펜으로 나의 손등을 탁탁 쳤고, 나는 그다음 날 바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늘 항상 그랬듯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 기억이 조금 사라질 때쯤 다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곳에서도 선생님은 너무 거칠었고, 나는 3개월 만에 또 음악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체육은 검도학원을 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보내주지 않았다. 반대로 미술학원은 신기하게도 늘 사람들의 관심의 집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미술시간이었다. 미술실에서 나는 주어진 과제를 하고 있었다. 미술 선생님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너 예고를 갈 생각 없니?라고 물어보셨고 ,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했다.

특별히 진로를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엄마는 미술학원을 다녀보라고 했고 나도 미술학원에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예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입시학원엔 친구가 없었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언니 오빠들뿐이었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나와는 맞지 않았다. 나는 평균 85점을 넘어야 해 하는 예고의 커트라인도 나에겐 너무 높았기에 이 핑계로 포기하자는 생각에 예고를 포기하고 일반고를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된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도 나는 미술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중학교와 다르게 고등학교는 조금 더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고, 나는 과제를 집에 들고 다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완성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선생님은 나에게 미대를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셨고, 또 엄마와 이야기를 해보라는 "두 번째 권유"를 받았다. 나에게 미술이라는 재능이 있나? 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주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은 2학년에 과를 정했어야 했다. 문과 이과 예체능. 그렇게 예체능을 선택하고 2학년부터 미술부라는 반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다. 나는 재능이 없는데, 순탄하네 , 좋아하는걸 쉽게 찾았네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면의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은 나는 공부에는 1도 관심이 없었고, 책 한 권도 자의로 읽는 아이가 아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오감의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보고 듣고 먹고 만지는 경험에는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었다. 바닥에 개미를 보면 만져봐야 했고, 유행하는 것은 꼭 경험해보고 싶었고, 글을 읽기보다 눈으로 다양한 시각적 요소가 있는 영상을 보는 것이 좋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나가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늘 방과 후에 놀이터에 서서 남자아이들과 공을 던지며 놀았다.


이러한 '다름' 때문에 나는 좌뇌보다 우뇌가 점점 발달되었다. 그래서 나는 논리적 수학적 순차적 기계적인 상황을 많이 어려워한다. 반대로 창의적 상상력 감정적 통찰적인 능력이 발달되어있다.


그 발달 속에서 나는 미술이라는 표현의 도구를 만났고, 감사하게도 나의 재능을 학교 선생님이 일찍 알아봐 주셨고, 진로를 빠르게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각자 어릴 적부터 조금 '다른'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면 , 나다움이 무엇인지 구체화할 수 있다.


나에겐 호기심이 남들과 조금 달랐고, 잔머리가 남들과 조금 달랐다. 그 다름이 나에게 미술이라는 분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인 경험을 통해 미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부터는 다름에서 찾은 재능을 성장시키기 위해 자의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지 않은 것 같다. 본능에 충실하며 하루에 집중하며 하루를 살았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왠지 조금 그립다. 나의 1막은 마무리가 되고  고등학교 2학년이 시작되자 노력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2막이 시작되었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입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공부도 해야 했지만 역시나 공부는 쉽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하루 종일 미술학원에 들어가 아침부터 저녁 9시까지 3-4번 시험을 치며 미술 공장의 기계를 돌리듯 그림을 찍어내며 보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늘 성공이라는 보장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키워드를 만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 대학 입시 실패였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회에서 3등을 할 정도로 입시 미술에 실력이 좋았던 나는 나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강했고 아마 그땐 자만심도 있었을 것이. 늦게 시작했는데 어느 미술학원에서든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나는 대학의 문을 넘지 못했다. 결국 2번의 실패로 3 수로 대학교를 가게 되었다.


이 실패로 나는' 겸손'이라는 키워드를 만났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만 잘한다고 인생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재능 앞에 겸손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재능은 쓸모 없어짐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잘하는 사람들 앞에서 쉽게 위축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경기도의 한 미술대학을 들어갔고, 그곳에서 정말 상상할 수 없이 행복하게 나의 예술성을 표현했다.

현역 시절에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경기도 대학. 하지만 나는 상상과 반대로 그곳에서 더 날개를 펼쳤고, 4학년 때는 100개가 넘는 그림(https://youtu.be/rnLSAz7 CEoQ)을 그릴 정도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대학시절을 불태웠었다. 그 결과로 나는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되었고, 내면도 정말 단단하게 많이 성장하여 세상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4학년 1학기까지 21세기 고흐 같은 그림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4학년 2학기부터 현실이라는 세계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것. 아닌 해야 만 하는 것은 취업이었다. 대학원을 가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다 정말로. 취업이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직업을 연결시키는 과정이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살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생겼고,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직업을 연결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직업이 좋아 보여 일을 해봐도 내가 생각한 일과 다른 경험이 빈번했고, 적은 경력으로 세상의 직업을 여러 가지 경험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졸업 후 8개월 정도 방황을 했다. 도대체 나는 뭐지? 이 사회에 나는 한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내가 찾는 직업이 이렇게 하나도 없어? 그냥 누가 날 고용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8개월 뒤에 나는 <세트 스타일리스트 구함 월 50>이라는 구인공고에 덜컥 마음이 빼앗겼고, 바로 지원하게 되었다. 다행히 합격했다.


세트 스타일리스트는 대학교의 연장선 같은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더 넓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50만 원이나 돈을 준다니" 현실감 없는 나에겐 그곳이 정말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2년 동안 정. 말. 열심히 일했다. 월급도 조금씩 올랐고 , 6개월 후에는 정직원이 되고, 1년 뒤에는 팀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알다시피 2년 6개월 후 나는 퇴사를 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노력이라는 키워드를 만나고 나서 노력의 결과는 행복과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듯이 나는 나의 첫회사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나의 노력이 늘 내 기대했던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쓸모가 없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원하던 그때에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이지 나의 노력은 늘 가장 알맞은 때에 맞추어 나에게 돌아왔다.


입시 시절 조금은 늦었지만 2번의 실패 3번의 도전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서 나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그림의 자유함을 느꼈다.

그 대학시절에 노력이 작가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세트 스타일리스트라는 경험을 선사해 주었고, 그곳에서도 그림 그리던 경험을 잘 적용할 수 있었다.

회사의 행복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 회사 때의 노력 덕분에 나는 멀티 플레이, 공간에 대한 시각, 다양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등 다양한 키워드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이 켜켜이 쌓여 현재 메이드 파니라는 나만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쌓고 있는 노력들이 언젠가 새로운 키워드로 발견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절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의 결과물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이면에 담긴 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 모두 각각의 작은 노력이 쌓여 현재의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나에겐 어떠한 '다름'이 있고 나는 나에게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을 '나다움' 으로 성장시키는 것.


이것이 혼자 일하다 보니 찾은 나의 발견이다.

오늘 한번 그 다름을 발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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