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by 낭랑한 마들렌

이 영화는 그동안 일부러 보지 않았습니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라니, 이름부터가 너무 뻔합니다. 이미 같은 제목의 작품도 여럿 있었고요. 괜히 진부한 신파에 휘말려 질질 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보고 말았네요. 그리고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훨씬 많이 울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이유 없이 서글퍼져 괜히 슬픈 이야기에 기대 눈물을 흘리고 싶은 날 말입니다. 그날 나는 한 편의 멜로 영화를 봤고,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아, 이런 삶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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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업체에서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하는 남자


채권추심원 한태일에게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무식하고 거칠고, 여간해서는 호감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빚 독촉을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주호정을 만납니다.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돌보고 있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대신해 빚까지 떠안게 된 젊은 여자였습니다.


태일은 엉뚱한 방식으로 호정에게 접근합니다. 빚을 조금씩 탕감해 주겠다며, 데이트를 하자는 식입니다. 투박하고 어설픈 구애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행동에는 진심이 섞여 있습니다. 호정의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까지 보면서, 호정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입니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기로 합니다. 치킨집을 열고 성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소박한 계획이었죠. 하지만 태일의 과거와 주변 환경은 그렇게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그는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고, 두 사람이 약속했던 삶은 무너진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태일이 혼자 짊어지고 있던 사연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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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만나는 곳


두 사람은 중간쯤에서 만난 것 같습니다. 대졸자에 번듯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주호정과 양아치 중의 센 양아치의 만남이라니, 어색합니다. 한태일은 교양은커녕 기본 예의범절도 없는, 어찌나 무식하고 거친 사람인지요. 그러나 나름의 방식으로 호정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버지를 돌보는 태일의 모습에 결국 호정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호정은 태일에게 보다 건강한 삶을 제안하지만, 동시에 그의 모습을 혐오하기보다 동조하는 식으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힙니다.

상대방을 자기 쪽으로 무작정 끌어당기려고만 했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어려웠을 겁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 상대에게 다가가고, 그런 뒤에야 상대를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기죠. 이렇게 중간쯤에서 만나니 ‘나의 자리’가 아닌 ‘우리의 자리’에 존재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삶을 뿌리째 흔들기도 하지요. 그때 그저 함께 흔들리면서 견고한 나의 자아를 조금 깨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더 잘 융화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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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도 있었다


한태일의 가족은 소위 ‘콩가루집안’입니다. 좁디좁은 집에 온 가족이 함께 삽니다. 아버지를 비롯해 태일의 형과 형수, 사춘기 소녀인 조카까지. 태일과 형수는 예전 친구사이인지, 편해도 너무 편하게들 대합니다. 아무에게도 예의범절은 없죠. 심지어 연로한 아버지는 경증 치매 환자임에도 마을버스 운전기사로 일합니다. 영화 <어카운턴트>에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대사가 떠오릅니다. “Heavy sigh….”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는, 아니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고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나름의 세계가 있습니다. 서로를 위하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교양 없지만 어느 가족들 못지않게 서로를 사랑합니다.



‘아, 저런 삶도 있구나.’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얼마나 편협하고 편파적인 사람인지요. 클래식 음악만이 으뜸이고 트로트가요는 천박한가요. 자고로 얼굴은 나처럼 둥글어야지, 넙데데하거나 사각진 얼굴은 잘못된 걸까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나는 이렇게 살고 그는 저렇게 사는 것일 뿐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나이 오십이 되니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 살아가는 모양이 제각각인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만 옳은 줄 알던 헛똑똑이 미련퉁이가 사람 되어갑니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이런 삶도 있구나.’ 이 영화가 나에게 남긴 작지만 큰 파문입니다.



한 장면이 떠올린 꿈


한태일이 혼수상태인 주호정의 아버지에게 책을 낭독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 딱 내가 꿈꾸는 장면이네! 의식이 없는 분을, 바람 쏘이시라고 옥상에 모시고 가서 만화책을 읽어 드립니다. 후에는 주호정이 한태일에게 꼭 그렇게 해줍니다. 바로 그 만화책을요. 그 장면에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나의 꿈 중 하나가 이겁니다. 자력으로 독서할 수 없는 분에게 일대일로, 침대 옆에서 낭독을 해드리는 겁니다. 특히 호스피스병동에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책을 낭독해 드리고 싶어요. 꼭 할 겁니다.





황정민 배우의 연기는 그 자체로 감동이었습니다. 모든 배우들이 탁월했지만, 특히 황정민 배우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본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 내 기억으로 그의 연기 변신은 <부당거래>부터였습니다. 전혀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주었는데, 이제는 뭐, 맡는 역할마다 그냥 빙의해 버리죠. 황정민 배우를 좋아해서 선택한 작품인데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습니다. 어쩌면 사랑이 우리를 바꾸는 방식도 바로 그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이문세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는 정말 작품에 딱 맞는 곡이었어요. 눈물이, 눈물이…. 이문세 오빠야는 단연 최고지만, 악동뮤지션 수현이 커버한 버전도 좋더군요. 가사를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건가요.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 이문세 <기억이란 사랑보다> (작사 이영훈)




나 없어도
걔 만나면 잘해줘야 돼, 아버지.
걔가 아버지가 없어.
그니까 아버지가 아버지 좀 해줘.
아버지 아들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야.
- 한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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